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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의 역사

고려의 2차 여진정벌

by 역사채우기 2021.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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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4SM7BqGXJM 

 

고려의 2차 여진정벌 #척준경 #사묘아리 #윤관 #별무반 #동북9성

고려는 과연 17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본 음성은 인공지능 성우 서비스 타입캐스트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인공지능 성우 지영 https://typecast.ai/ 영상 속

youtu.be

 

 

12세기 초, 여진족은 완안부의 추장인 오아속(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의 형)이 중심이 되어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고려는 긴장을 느끼고, 장차 고려에도 위협을 끼칠 것으로 판단하여 임간, 윤관 등을 보내어 여진족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연이어 패하고 돌아왔습니다.

 

고려의 1차 여진정벌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7

 

고려의 1차 여진정벌

이번 시간에는 고려의 1차 여진정벌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https://youtu.be/lefc3hyg-FM 거란의 1ㆍ2ㆍ3차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고려는 주변 국가들로부터 얕볼 수 없는 나라로 인식되었고,

historicalhistory.tistory.com

 

 

 

| 고려의 2차 여진정벌

윤관은 1차 여진정벌에서 고려가 패배한 원인이 고려의 주력은 보병인데 여진족의 주력은 기병이니 보병으로 기병을 상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별무반의 창설을 건의한 윤관 장군 동상

 

 

그래서 윤관은 조정에 별무반(신기군(기병), 신보군(보병), 항마군(승병)으로 이루어진 고려의 특수부대)의 창설을 건의하였고, 이에 17만에 이르는 고려군이 결성되어 여진족을 향해 진군하였습니다.

 


1107년, 고려군은 부대를 다섯(본군, 좌군, 중군, 우군, 수군)으로 나누어 여진족을 공격하였는데 윤관이 이끄는 본군은 석성에 이르렀고, 공격하기에 앞서 항복을 권유했으나

 

"우리는 한 번 싸워서 승부를 낼 것이며 절대 항복하지 않겠다"

 

라고 말하며 항전을 다짐하였습니다.

 

여진족이 항복하지 않자 고려군은 석성을 공격하였고, 이에 맞서 여진족은 화살을 비처럼 쏘며 결사적으로 저항하니 고려군의 피해는 커져만 갔습니다.


이때 윤관이 전황을 뒤집기 위해 척준경에게 "해는 저물고 전황이 위급하니 그대가 나가 적을 공격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소드마스터 척준경의 등장(드라마 도깨비 중에서)

 

 

그러자 척준경이 방패를 두르고 성 아래의 적진으로 들어가 추장 여럿을 죽이며 사기를 높였고, 윤관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총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진족은 물밀 듯이 밀려오는 고려군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절벽까지 몰려 투신하였고, 그 결과 성 안의 여진족이 모두 섬멸되었습니다.


이후 고려의 본군은 이위동을 공격하여 1천 2백 명을 죽이며 승리하였고, 나머지 중ㆍ좌ㆍ우군 역시 각각 고사한촌, 심곤촌, 광탄촌 등을 공격하여 모두 승리하였습니다.

 


이 원정으로 고려군은 모두 135개의 부락을 파괴하였으며, 4,940여 명의 여진족을 사살하였고, 1,030여 명의 포로까지 잡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윤관은 넓혀진 영토에 맞게 동쪽으로는 화곶령, 북쪽으로는 궁한이령, 서쪽으로는 몽라골령으로 국경을 새로이 정하였습니다.


이어서 윤관은 장수들을 보내 영주, 웅주, 복주, 길주에 성을 쌓아 여진족의 침입을 방어하였습니다.

여진족 정벌 후 비석을 세우는 장면(척경입비도)

 

 


| 고려와 여진족의 공방전과 척준경의 활약

해가 바뀌어 1108년, 윤관과 오연총이 8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한촌 병목의 좁은 구간으로 진군하다가 여진족의 매복에 걸려 고려군이 전멸하였고, 윤관의 주위에는 10여 명의 군사만 남아있었으며 오연총은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여진족은 윤관 주위를 겹겹이 포위해왔고, 자칫하면 고려의 총사령관이 포로로 잡힐 뻔한 이때 척준경이 함성을 지르며 군사 10여 명을 이끌고 적진으로 진입하여 단숨에 10여 명을 죽여 포위를 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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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준경의 활약(드라마 도깨비 중에서)

 


이에 때맞추어 최홍정과 이관진이 군사를 이끌고 합세하자 여진족이 달아나기 시작했고, 고려군은 추격하여 36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윤관은 기적적으로 살아나 영주성으로 돌아왔고, 눈물을 흘리며 척준경에게

 

"이제부터 내가 너를 아들같이 여길 것이니 너는 나를 아비와 같이 여기도록 하라"

 

고 당부하였습니다.

내가 네 애비다

 


이후 추장 아로환 등 403명이 고려군에 항복한 데 이어 1,460여 명이 좌군에 항복하며 고려군은 간신히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진족이 2만 군사를 이끌고 영주성으로 진격해왔습니다.

 


윤관과 여러 장수들은 적군의 규모를 보고 "중과부적이니 맞서 싸우지 말고 성에서 굳게 지켜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척준경

 

"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았다가 적의 규모가 늘고 성 안의 식량이 줄어드는데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게 될 것입니다. 제가 가한촌에서 싸워 적을 물리친 것처럼 이번에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테니
성에 올라가 구경하십시오"

 

라고 말하며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척준경 : 내가 알아서 할테니 구경이나 하시오

 

 

척준경이 말을 마치고 결사대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가 여진족 19명의 목을 베니 적이 패주하였습니다.


척준경이 전투를 마치고 개선하자 윤관이 몸소 나와서 손을 잡고 서로 절하였습니다.

 


이후 권지승선 왕자지가 공험성에서 윤관이 있는 중성대도독부로 오다가 여진족 추장 사현에게 패한 뒤 말까지 빼앗기게 된 소식을 들은 척준경은 또다시 결사대를 이끌고 가서 여진족을 물리치고, 빼앗긴 말까지 되찾아주었습니다.

 


고려에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여진족은 고려에 계속 공세를 가해왔고, 여진족 군사 수만 명이 웅주성을 포위하였으나 최홍정(앞서 윤관을 구출하는데 도움을 준 장군)이 네 방향으로 성문을 열고 나가 8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말 40필과 많은 병장기를 노획하였습니다.

 


하지만 웅주의 고을 수령이 척준경에게 예전에 척준경이 말했던 것처럼 식량이 떨어져 가고, 구원병이 오지 않아 방어의 어려움을 피력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척준경이 밤에 줄을 타고 성을 나선 후 여진족의 포위를 뚫고 정주로 가서 군사를 정돈하여
웅주로 오던 중 길주에서 여진족과 조우하여 대패시키니 여진족이 웅주성의 포위를 풀었고, 성 안 사람들이 감격하여 울었다고 합니다.

2차 여진정벌에서 척준경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여진족의 공격이 계속되자 윤관은 함주와 공험진에도 성을 쌓았고, 공험진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으며 의주, 통태진, 평융진에도 추가로 성을 쌓아 동북 9성이 축조되었습니다.

 

참고로 윤관이 쌓은 동북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논란이 있으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진족이 웅주성을 다시 포위하니 윤관과 오연총이 다시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적을 패주시켰습니다.

 

 

 

| 강적 사묘아리의 맹활약과 길주 공방전

시간이 흘러 1109년에는 여진족이 길주(현재 함경남도 길주로 추정)를 포위하였습니다.


이에 오연총이 길주를 구원하기 위해 진군하던 도중 공험진에서 여진의 명장 사묘아리에게 기습을 당해 고려군이 대패하였고 장졸들은 무기를 버리고 흩어지면서 공험진이 함락되었습니다.

여진정벌의 최대 걸림돌 사묘아리

 

 

고려군은 공험진을 되찾기 위해 나섰으나 여진족의 저항을 이겨내지 못해 퇴각하였고, 사묘아리가 퇴각하던 고려군을 추격하여 고려군이 강을 건널 때 후미를 쳐서 패주시켰습니다.


이어서 오연총이 이끄는 고려군이 군을 재정비하여 오자 사묘아리가 또다시 맹활약을 펼치며 고려군을 물리쳤습니다.

 


이렇게 되니 길주의 고려군은 여러 달 동안 포위당하며 풍전등화의 위기였으나 병마부사 이관진이 군사를 독려하여 불과 하룻밤 사이에 내성(이중 방어)을 쌓으니 외성을 뚫고 들어온 여진족이 내성이 쌓여있는 것을 보고 전의를 상실하여 철수하였습니다.

여진족 : 몇 달 동안 공격해서 겨우 성을 넘었는데 또 성?

 

 


| 동북 9성의 반환

고려 조정은 1109년의 길주성 전투 이전에는 동북 9성을 어떻게든 사수하려고 했으나 잦은 소모전으로 고려군에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고, 전투에 차출된 농민들이 너무 많아 농사도 짓지 못했고,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비용 역시 부담을 가중시켰습니다.

잦은 소모전으로 고려군 역시 만만치 않은 피해를 보았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려 조정은 윤관과 오연총에게 가한촌갈라수 전투에서 패전한 죄를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들끓었습니다.

 


이때 만만치 않은 피해를 본 여진족 측에서 대대로 조공을 바칠 것이며, 고려에 기왓장 하나 던지지 않을 테니 동북 9성을 반환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고려와 여진족 모두 총력전을 펼쳐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가 요청을 받아들여 동북 9성은 1년 만에 반환되었습니다.

 


고려는 크게 2가지 이유로 동북 9성을 되돌려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째로, 고려의 여진 정벌은 병목 지역을 확보한 후 그 길을 막으면 능히 적의 반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실상은 수륙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동북 9성 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여진족이 공격해왔기 때문에 방어하는 데 문제가 많았습니다.

여진족의 동시다발적인 공격(동북 9성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음)

 


둘째로, 1107년에 고려군이 진군하기 전 460여 명의 추장을 불러모아 죽일 때 친 고려파의 추장까지 죽였기 때문에 고려를 지원할 수도 있던 여진의 부락들이 완안부의 여진에 합류하면서 여진족의 종족적 결집이 이루어져 고려는 더욱 규모가 커진 군대와 상대해야 했습니다.

 


이후 1116년에는 발해 유민 고영창이 발해 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요동 지방에 대발해국을 세웠으니 동북 9성이 이때까지 유지되었다면 두 나라가 힘을 합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을 되찾을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고려와 대발해국이 연합한다면?(지도는 정확하지 않음)

 

 

 

| 여진족의 무서운 기세

한편, 완안부의 여진족은 동북 9성의 땅을 발판으로 세력을 더욱 확장하였으며, 1113년에는 오아속의 뒤를 이어 완안아골타(후일 금나라의 시조)가 추장이 되었습니다.

금나라의 시조 완안아골타의 동상

 


여진족은 요나라(거란)에 선전포고하고 연전연승한 뒤 1115년에 금나라를 세웠고, 1116년에는 대발해국
멸망시켜 발해의 마지막 부흥운동을 종결시킨 후 발해 유민까지 포섭하였습니다.

 

발해의 부흥운동에 관련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

 

발해의 또다른 시작! 발해부흥운동

https://youtu.be/uU7UHdDmivM 이번 시간에는 발해 멸망 후 이어진 발해부흥운동(후발해, 정안국, 흥요국, 대발해국)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 후발해의 역사 925년 요나라(거란족)의 침입으로 926년에 발해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이어서 금나라는 1125년에 연운 16주를 탈환하려는 송나라(북송)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협공하였고, 요나라는 대송 전선에서 송나라 군대를 물리치며 오히려 전진하는 기염을 토했으나 대금 전선에서 크게 패하며 천조제(요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포로로 잡히면서 멸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송나라가 금나라와 협공 시 주기로 했던 공물을 바치지 않고, 천조제와 접촉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금나라가 군사를 보내 송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개봉을 함락시켰으며, 정강의 변을 일으켜 송나라 황제 휘종흠종 등 3천여 명을 포로로 데려가 송나라(북송)를 멸망시키고 남송이 이어지게 됩니다.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까지 남쪽으로 내쫓은 금나라



고려가 여진을 정벌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진족은 여러 부락으로 쪼개져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나 20년 동안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여 고려, 요나라, 송나라와 같은 주변의 굵직한 나라들을 상대로 모두 승리를 거두며 동북아시아의 한 축으로 우뚝 솟게 되었습니다.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송을 멸망시킨 금나라

 

 

 

다음 시간에는 고려의 마지막 요동정벌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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