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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의 역사

12명의 결사대로 몽골군에 2번 승리한 김경손 장군

by 역사채우기 2021.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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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몽골의 침입 때 귀주성 전투이연년 형제의 난을 진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김경손 장군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https://youtu.be/JYMtOOW9d-U

 

 

 

| 몽골의 침입

1225년 1월, 몽골 사신 저고여의 피살 사건(고려에 사신으로 온 뒤 국경에서 누군가에 의해 피살됨)을 구실로 몽골의 오고타이 칸은 살리타이를 보내 고려를 침략하였고, 1231년 8월, 몽골군은 압록강을 지나 함신진철주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저고여(드라마 무신 중에서)

 

 

이후 몽골군이 정주까지 침입하자, 단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몽골군을 격퇴한 장군이 있었으니 당시 분도장군으로 근무하던 김경손 장군이었습니다.

귀주성에서 지휘하는 김경손 장군(드라마 무신 중에서)

 

 

 

| 귀주성 전투

하지만 김경손 장군이 성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주민과 군사들이 모두 도망가버렸기 때문에 12명의 병사와 함께 귀주(강감찬이 거란의 3차 침입 때 거란의 10만 대군을 격파했던 곳)로 이동하였습니다.

 

당시 귀주성에는 서북면 병마사 박서 등 5천여 명의 병력이 집결해있었고, 몽골군은 살리타이의 부하 우에르가 이끄는 북로군 1만 명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획득한 강동6주 중 귀주

 


마침내 1231년 9월 3일, 몽골군이 귀주성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김경손 장군은 정주성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기습하여 몽골군을 격퇴한 후 당당히 귀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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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의 [김경손 열전]에는 몽골군이 퇴각하자 김경손이 진을 정비하고 쌍소금을 불며 돌아오니 박서가 맞이하여 절하며 울었고 김경손 또한 절하며 울었으며, 박서는 이 일에 감명을 받아 수성하는 일은 일체 김경손에게 위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윽고 몽골군은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 밤낮으로 공격해왔습니다.

 

몽골군이 수레에 풀과 나무를 싣고 굴리며 공격해오자 김경손 장군은 포차로 끓는 쇳물을 부어 수레에 실은 풀을 태우니 몽골군이 퇴각하였습니다.


몽골군은 다시 공격해왔고, 김경손 장군은 의자에 앉아서 지휘하고 있었는데 몽골군이 쏜 포탄이 머리 위를 지나 뒤에 있던 병사에게 명중해 전신이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이에 부하들이 의자를 옮기자고 하였으나 김경손 장군은 군사들의 마음이 흔들릴 것을 염려하여 옮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20여 일 동안 귀주에서 몽골과 고려가 공방전을 치르면서, 김경손 장군이 상황에 따라 귀신같이 대응하자 어느 몽골군 장수는

 

"이렇게 작은 성이 대군을 맞아 싸우는 것을 보니, 하늘이 돕는 것이지 사람의 힘은 아니다."

 

라고 혀를 내두르며 포위를 풀었습니다.

고려와 몽골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던 귀주성

 

 

얼마 후, 김경손 장군은 귀주성 전투의 공으로 대장군 지어사대사로 임명되었으며, 귀주성 전투는 '고려의 안시성 전투'라 불릴 만큼 고려의 값진 승리였습니다.

 

 

 

| 이연년 형제의 난

시간이 흘러 1237년 몽골의 3차 침입 도중 백적도원수를 자칭한 이연년 형제의 난이 일어나자 김경손 장군은 대장군 겸 전라도지휘사로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기 위해 나주성으로 향했습니다.

몽골의 침입을 틈타 난을 일으킨 이연년 형제(드라마 무신 중에서)

 


이 소식을 알게 된 이연년 형제는 무리를 이끌고 나주성을 포위하였고 김경손 장군이 서른 명 정도의 별초를 뽑아 성문을 열고 나가니 이연년이 그 무리에게

 

"지휘사(김경손)는 바로 귀주에서 공을 세운 대장으로 인망이 대단히 두텁다.
내가 사로잡아서 도통으로 삼아야 하겠으니 활을 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이연년이 용맹을 믿고 전진해 김경손 장군의 말고삐를 잡으려 했으나 김경손 장군이 칼을 빼들고 사기를 드높이자 별초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고, 마침내 이연년을 죽이니 승기를 얻어 적도가 완전히 궤멸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일대가 다시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 영웅의 최후

이후 1249년, 최우의 뒤를 이어 집권하게 된 최항김경손 장군이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는 것을 시기하여 백령도로 유배 보냈습니다.

김경손 장군이 유배된 백령도(빨간 부분)

 


2년 뒤에 최항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계모 대씨를 죽이고, 대씨의 전 남편 아들 오승적강에 던져 죽였습니다.

 

그리고 김경손 장군 또한 오승적의 인척이라고 하여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최항(드라마 무신 중에서)

 

 

이로써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은 적이 아닌 조정에 의해 비참하고도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김경손 장군은 귀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이연년 형제의 난을 진압하여 조야에서 그를 의지하고 높이 받들었는데, 최항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해 사람들이 모두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였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입에 맞서 고구려, 나아가 한민족을 지켜낸 중심에 있던 요동성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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