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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48] 북관대첩(2) 매국노 처단과 장덕산, 석성령 전투

by 역사채우기 2021.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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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인 처단

6진 중 하나인 종성진에서 순왜의 대표 인물인 국세필을 처단하고, 여진족의 침입까지 막은 정문부는 휘하의 의병을 이끌고 국경인이 있는 회령으로 진군했습니다.

 가토의 진군로와 순왜 무리

 


이에 앞서 정문부가 6진 곳곳에 격문을 보내 의병의 궐기를 촉구했고, 이 무렵 명나라 군대가 곧 참전할 것이고, 전란이 평정되면 순왜들을 제일 먼저 토벌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중국 군사가 곧 오게 되는데, 조정에서는 이미 북계를 역적의 소굴로 판단하고 있으니, 왜적을 평정한 뒤에는 맨 먼저 토벌할 것이다
- 만호 고경민이 함경도 백성들에게 전한 말

명나라 군대(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그러자 6진의 백성들은 정문부의 의병 부대에 앞다투어 합류했고, 회령의 유생 오윤적은 국경인을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시도하기도 전에 일이 발각되면서 오윤적은 국경인에게 잡히고 말았고, 국경인은 오윤적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참수하여 정문부에게로 쏠리는 민심을 잡으려 했습니다. 

이렇게 국경인은 오윤적을 죽일 날을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유생 신세준이 군사들을 모아 국경인의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에 화들짝 놀라 집 밖으로 뛰쳐나온 국경인은 신세준에게 붙들려 참수되었습니다.

 


| 정말수 처단

이로써 또 하나의 거물인 국경인까지 처단되었고, 그가 다스리던 회령까지 수복한 정문부강문우에게 일부 군사를 주어 명천 탈환을 지시하였습니다.

대동여지도 명천 지역 지도(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천에는 또 다른 순왜 정말수가 있었고, 이곳에서도 인근의 소식을 들은 농민들이 들고일어나 정말수 일당에 대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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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토의 진군로와 순왜 무리



정말수는 화포까지 사용하며 이들의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으나 그럴수록 민심은 정말수에게서 멀어져 갔고, 이에 대항하는 세력만 커질 뿐이었습니다.

농민봉기(군도 : 민란의 시대 중에서)



그런데 이때, 정문부가 보낸 강문우의 기병이 명천에 다다랐고, 이를 본 백성들이 서로 맞이하니 밀려드는 백성과 의병을 감당할 수 없었던 정말수는 몰래 성을 빠져나와 산에 숨었다가 경성 토병 진덕인에게 붙잡혀 죽었습니다.
매국노의 최후


 

| 석성령, 장덕산 전투

가는 곳마다 승리하며 함경북도의 대부분을 회복한 정문부는 지체하지 않고 길주로 향했습니다.

정문부 장군



이에 앞서 정문부는 3,500의 군사를 나누어 정문부 자신과 종성부사 정현룡이 1천여 명을 이끌고 길주성으로 진군했고, 길주 출신 군사 1천여 명을 고령첨사 유경천에게 주어 일본군의 동태를 감시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원부사 오응태에게 1천 명을 주어 인근에 매복을 지시했으며, 원충서의 2백 군사에게 길주 북쪽에 진을 치게 했고, 마지막으로 3백 명의 군사를 명천에 두었습니다. 

 


10월 30일, 원충서는 길주 북쪽의 석성령을 지나던 일본군 1천여 명을 향해 기습을 감행했습니다.

일본군은 공격을 받자 처음에는 놀랐으나 조선군의 숫자가 적다는 것을 알고는 맞서 싸우려 했으나 명천에 있던 3백의 기병이 갑자기 들이쳤습니다.

조선의 기병(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단병접전에 강한 일본군이었으나 보병 중심의 군대로는 기병 중심의 조선군에 상대가 되질 않았고, 일본군은 길주성에서 동쪽으로 5리 떨어진 장덕산으로 퇴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정문부가 미리 진을 쳐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조총을 쏘며 산을 오르는 일본군에 맞서 화포를 쏜 뒤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여 마구 짓밟았습니다. 

결국, 살아남은 일본군이 계곡으로 몸을 숨기니 기다렸다는 듯이 의병들은 계곡을 포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눈이 내리고 바람이 매섭게 불자 일본군은 얼어 죽거나 쓰러지는 자가 속출했습니다.

함경도의 추위는 일본 규슈 지방 출신 군대에게 재앙이었습니다.

 


다음 날, 조선군은 동사 위기에 처한 일본군을 손쉽게 베어 넘겨 수급 6백 두를 취했으며, 조총 26자루, 말 118필 등 수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습니다.

이렇게 석성령과 장덕산에서 큰 승리를 거둔 정문부는 다시 길주성으로 향했으며, 그를 따르는 의병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습니다.

길주성(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다음 시간에는 북관대첩(3) 길주성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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