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도요토미 히데요시9 임진왜란 때 적과 가장 가까우면서 안전했던 곳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많은 백성들은 왜적의 공격을 피하고자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잘 훈련된 군대와 거북선을 앞세워 연전연승 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었고, 제해권을 확보했습니다. 이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강화가 진행되고, 교착상태가 지속되자 조선 수군은 한산도에 삼도(경상도ㆍ전라도ㆍ충성도)의 수군을 관할하는 전진기지(삼도수군 통제영)를 구축하면서 일본 수군과 지근거리에서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싸울 때마다 승리하는 조선 수군을 보며 최전방인 통제영 인근에 정착하는 사람이 많았고, 진주대첩의 소식이 알려진 진주성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진주대첩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 2023. 5. 30. 임진왜란 때 의병이 일어난 현실적인 이유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으로 *정명가도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일본군 수십만이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임진왜란) * 정명가도(가도입명) :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길을 빌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 고경명 등의 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나 유리한 지형을 적극 활용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며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어 국난 극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전란 중에는 국경인처럼 일본군에 협력한 자들도 있었지만(순왜) 의병의 주축이었던 농민들이 낫과 호미 대신 무기를 든 것은 자기 고향을 지키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그들이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국경인의 반란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 2023. 1. 18. [임진왜란86] 남원성 전투(1) 사나이 국은을 갚을 때가 이 날이 아닌가! | 일본군의 전라도 재침공 계획 지난 임진년(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개전 초반, 일본군이 승승장구하며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하였으나 결정적 승리를 얻지 못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결국에는 남쪽으로 밀려난 원인이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물리치지 못해 보급에 차질을 빚었던 것과 곡창지대였던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데 있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후 1597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라도 침략을 지시하였습니다. (정유재란) 이에 일본군은 14만의 병력을 좌군과 우군, 이렇게 둘로 나누어 우군은 총사령관을 모리 히데모토로 삼고, 임진왜란 때 2군과 3군 선봉장을 맡았던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을 포함하여 총병력 73,.. 2022. 6. 12. [임진왜란69]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 | 난공불락 진주성의 함락 제2차 진주성 전투는 6천의 관군과 의병이 9만 3천의 일본군을 맞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 동안 격전을 펼쳤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상황은 행주대첩과 웅포해전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데 이어 의병 활동으로 보급로가 계속 차단이 되자 일본군은 한양을 버리고 경상도 남해안 방면까지 밀린 상황에서 명나라와의 강화 회담 중이었음에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그리고 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에서 대패했던 것을 설욕하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력한 지시 때문에 일어났던 이 전투의 결과는 매우 참혹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을 함락시키면 진주성 내의 사람은 물론이고 개나 고양이 할 것 없이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기 때문에 진주성에.. 2022. 1. 28. [임진왜란66] 제2차 진주성 전투(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광기 어린 분노 | 한양 탈환 1593년 4월 18일, 일본군이 수도 한양에서 철수한 후 남하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20일 만에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후 거의 1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때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옥포해전~웅포해전으로 이어지는 이순신 및 조선 수군의 활약과 더불어 전란 초기 패배와 도주하기에만 급급했던 관군이 의병과 합심하여 일본군에 결코 쉽게 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은 제대로 된 보급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몰아내긴 했지만, 여전히 대군이 남아있었고, 제4차 평양성 전투에서의 압도적인 화력을 맛보았던 경험 때문에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은 당시 한양에 있던 대부분의 지휘부가 모여서 공격했지만,.. 2022. 1. 19. [임진왜란27] 제해권을 장악하라! 이순신의 3차 출정 | 진군에 제동이 걸린 일본군 1592년 6월,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가 전라도를 공격하면서 이치, 웅치, 안덕원 등지에서 치열한 혈전이 펼쳐질 무렵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지휘하고 있는 남쪽 바다에서도 전란의 흐름을 바꿀 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그동안 옥포에서의 승리를 시작으로 합포ㆍ적진포ㆍ사천ㆍ당포ㆍ당항포ㆍ율포에서 적선을 일방적으로 격침시키며 남해의 제해권을 넓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일본 수군은 서해로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안도로 진군해있는 일본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제때 보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명나라 군대가 참전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조선의 최후방어선이자 선조가 있는 의주를 목전에 두고도 더는 진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조선 수군의.. 2021. 11. 12. [임진왜란3] 동래성 전투!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 https://youtu.be/_sDBIdDCWys 1592년 4월 13일, 일본 제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18,700명의 군사와 700척의 전함을 이끌고 부산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고 다음 날인 4월 14일, 상륙하여 부산진성을 공격하였습니다. 부산진성의 백성들과 수백의 군사들은 첨사 정발의 지휘 아래 죽기를 각오하고 맞섰으나 모두 전사하면서 성이 함락되었고, 4월 15일에는 서평포와 다대포를 침략한 일본군을 다대포첨사 윤흥신이 군민들과 함께 결사항전하였으나 다대포성 역시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부산 일대에 교두보를 확보한 일본군은 동래성(현재의 부산광역시 동래구)으로 향했습니다. 동래성은 앞서 전투를 치렀던 부산진성과 다대포성보다 규모가 큰 성이었고, 동래성을 지키는 장군은 동래부사 송상.. 2021. 10. 11. [임진왜란1] 전쟁의 시작! 부산진성 전투 https://youtu.be/UhyYSoJbFRU 이번 시간부터는 임진왜란을 시리즈로 이어나가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건조하고 시험까지 모두 완료한 날이 1592년 4월 12일이었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1592년 4월 13일, 일본 제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700척의 함대와 18,7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부산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습니다. 거북선에 대해 더 알고싶으시면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33 조선 최고의 돌격전함! 거북선 https://youtu.be/4bkZUX0zezw 이번 시간에는 조선 최고의 돌격전함인 거북선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태종 시기 첫 거북선 거북선은 조선 초기 141.. 2021. 10. 9. 이전 1 2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