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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55

외국인 출신으로 우리나라에서 활약한 인물들 | 이지란 (퉁두란) 여진족 출신인 퉁두란(본명은 퉁쿠란투란티무르)은 고려에 귀화하여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간 뒤 의형제가 되었고, 이름을 이지란으로 개명하였습니다. 이후에는 고려 말 해안 전역을 약탈하던 왜구들과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웠는데, 특히 황산(현 전북 남원시 일대)에서 한창 기세등등했던 적장 아지발도를 사살하는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황산대첩) 그리고 조선 건국 이후에는 개국 1등공신에 책록되었고, 1ㆍ2차 왕자의 난에 참여하여 이방원(훗날 조선 3대 임금, 태종)을 도왔습니다. | 김충선(사야가) 그리고 200년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의 2군을 이끈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으로 참전한 사야가는 부산진성 함락 직후 조선에 귀화하여 크고 작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조선군 훈련과.. 2023. 5. 31.
임진왜란 때 적과 가장 가까우면서 안전했던 곳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많은 백성들은 왜적의 공격을 피하고자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잘 훈련된 군대와 거북선을 앞세워 연전연승 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었고, 제해권을 확보했습니다. 이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강화가 진행되고, 교착상태가 지속되자 조선 수군은 한산도에 삼도(경상도ㆍ전라도ㆍ충성도)의 수군을 관할하는 전진기지(삼도수군 통제영)를 구축하면서 일본 수군과 지근거리에서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싸울 때마다 승리하는 조선 수군을 보며 최전방인 통제영 인근에 정착하는 사람이 많았고, 진주대첩의 소식이 알려진 진주성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진주대첩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 2023. 5. 30.
임진왜란 때 의병이 일어난 현실적인 이유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으로 *정명가도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일본군 수십만이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임진왜란) * 정명가도(가도입명) :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길을 빌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 고경명 등의 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나 유리한 지형을 적극 활용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며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어 국난 극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전란 중에는 국경인처럼 일본군에 협력한 자들도 있었지만(순왜) 의병의 주축이었던 농민들이 낫과 호미 대신 무기를 든 것은 자기 고향을 지키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그들이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국경인의 반란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 2023. 1. 18.
뛰어난 아들을 질투한 암군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세종대왕처럼 성군인 왕이 있는가 하면, 연산군처럼 폭군이거나 인조처럼 외교를 잘못하거나 잘못된 판단을 내려 나라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해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했던 암군도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암군 중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아들이자 후계자를 질투한 사례에 다루어 보겠습니다. 선조의 아들들(정원군(인조의 아버지), 순화군, 임해군)은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일삼거나 걸핏하면 죽이는 등 망나니짓을 일삼았으나 광해군만큼은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끄는 동안 전장 한복판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백성들을 위무하며 차기 국왕으로써 해야 할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 분조 :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쳐했을 때 조정을 둘로 나누는 일 하지만 임진왜란 초반에 수도를 버리고 도망다니면서(한양-평.. 2023. 1. 10.
[임진왜란84] 절망에서 희망으로! 수군 재건에 나서는 이순신 7월 16일의 칠천량 해전과 뒤이은 원균의 실책으로 100척이 넘는 판옥선 중 절반 이상과 귀선(거북선) 3척이 모두 격침되었고, 이순신의 휘하에서 불패의 신화를 자랑했던 노련한 군사들은 죽거나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에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시절 숨죽이고 왜성에 틀어박힌 채 해전 자체를 두려워했던 일본군은 위의 해전으로 거칠 게 없어지자 천하의 요새 견내량을 넘어 한산도 통제영을 접수하고 인근을 노략질하였습니다. 이때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이 벌어진 이틀 후인 7월 18일, 조선 수군의 대패를 보고받자마자 권율과 향후 대책을 논의 후 9명의 군관과 6명의 병사와 함께 초계를 지나 단성, 진주, 곤양, 노량을 지나면서 거제 현령 안위, 경상우수사 배설 등의 패잔.. 2022. 6. 4.
[임진왜란80] 도원수 권율에게 곤장을 맞는 원균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부산포 공격에 30만 육군이 필요하다는 장계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당연히 그 요청을 들어줄 순 없었고 대신 도원수 권율 휘하의 육군 5천여 명을 수군으로 배속시켜 주었습니다. 지난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인 시절에는 수군 진영의 병사들을 육군으로 배속시켰던 일이 있었으니 선조가 원균을 얼마나 총애했는지, 그리고 원균에 대한 기대감이 얼마나 컸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원균은 일부 병력을 지원받게 되었고, 계속되는 출전 압박에 부산포로 출정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1597년 6월 18일, 원균은 출정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적선 두 척을 불태웠을 뿐 연안에 늘어선 왜성에서의 포격과 일본 수군의 저항으로 보성군수 안흥국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습니다. 이를 당.. 2022. 2. 27.
[임진왜란71]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출격! 제2차 당항포 해전 1593년 8월,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군의 해상 퇴로를 차단함은 물론, 연합함대의 지휘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경상좌ㆍ우수영, 전라좌ㆍ우수영, 충청수영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고,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를 떠나 한산도에 전진기지(통제영)를 세웠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보통의 경우 경상우수사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하였으므로 경상우수사 원균이 개전 초반 70척 혹은 100척의 함대를 수장시키지 않았더라면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후 1594년 3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일본군의 동향을 살피던 중 당항포에 적선 30여 척이 정박해 있다 는 첩보를 받고 다시 한번 출정에 나섰습니다. 이는 이순신의 6차 출전이었으며, 동원된 전선.. 2022. 2. 1.
[임진왜란69]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 | 난공불락 진주성의 함락 제2차 진주성 전투는 6천의 관군과 의병이 9만 3천의 일본군을 맞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 동안 격전을 펼쳤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상황은 행주대첩과 웅포해전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데 이어 의병 활동으로 보급로가 계속 차단이 되자 일본군은 한양을 버리고 경상도 남해안 방면까지 밀린 상황에서 명나라와의 강화 회담 중이었음에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그리고 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에서 대패했던 것을 설욕하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력한 지시 때문에 일어났던 이 전투의 결과는 매우 참혹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을 함락시키면 진주성 내의 사람은 물론이고 개나 고양이 할 것 없이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기 때문에 진주성에.. 2022.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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