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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117

임진왜란 때 적과 가장 가까우면서 안전했던 곳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많은 백성들은 왜적의 공격을 피하고자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잘 훈련된 군대와 거북선을 앞세워 연전연승 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었고, 제해권을 확보했습니다. 이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강화가 진행되고, 교착상태가 지속되자 조선 수군은 한산도에 삼도(경상도ㆍ전라도ㆍ충성도)의 수군을 관할하는 전진기지(삼도수군 통제영)를 구축하면서 일본 수군과 지근거리에서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싸울 때마다 승리하는 조선 수군을 보며 최전방인 통제영 인근에 정착하는 사람이 많았고, 진주대첩의 소식이 알려진 진주성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진주대첩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 2023. 5. 30.
임진왜란 때 의병이 일어난 현실적인 이유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으로 *정명가도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일본군 수십만이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임진왜란) * 정명가도(가도입명) :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길을 빌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 고경명 등의 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나 유리한 지형을 적극 활용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며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어 국난 극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전란 중에는 국경인처럼 일본군에 협력한 자들도 있었지만(순왜) 의병의 주축이었던 농민들이 낫과 호미 대신 무기를 든 것은 자기 고향을 지키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그들이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국경인의 반란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 2023. 1. 18.
[임진왜란117] 임진왜란이 조선, 명나라, 일본에 끼친 영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헛된 망상으로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은 1598년, 남해왜성 소탕전을 끝으로 7년간에 걸친 전쟁이 종결되었습니다. | 임진왜란이 조선에 끼친 영향 그리고 조선은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일본을 조선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전쟁을 치렀던 장소가 조선 땅이었기 때문에 조선, 명나라, 일본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여러 전투를 치르면서 군인과 의병이 많이 죽어 국방력이 감소했고, 오랜 전란으로 인한 국토 황폐화, 경작지 감소, 이에 따른 기근과 전염병 발생, 거기다 전공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된 일본군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코와 귀를 베어 본국으로 보내면서 수많은 백성이 죽어갔습니다. 일례로, 당시 관료였던 이산해가 쓴 시인 [노방원]에는.. 2022. 9. 25.
[임진왜란116]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 남해왜성 소탕전 노량해전에서 관음포에 갇힌 일본군 일부는 남해도에 상륙한 뒤 남해 선소왜성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 소오 요시토시가 수비병 1천 명과 함께 주둔했던 곳이었고, 여기에는 소오 요시토시와 시마즈 요시히로의 부장 키이레 세주노카미, 카바야마 쿠다카 등 1천여 명이 남아있었습니다. 이들은 급히 뗏목을 만들어 창선도로 탈출하기 위해 병력을 실어 나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포구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습니다. 조명 연합수군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노량에서 대승을 거둔 조명 연합수군은 남해도에 적이 상륙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경상우수사 이순신(충무공 이순신과는 동명이인)과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지휘 아래 남해도를 포위한 후 수색하였습니다. 이들은 남해도 곳곳에 일본군이 버리고 간 배를 모두 불태웠고.. 2022. 9. 23.
[임진왜란115] 노량해전(5) 한 명의 적도 놓쳐서는 안된다! 최고 지휘관인 이순신은 죽었지만, 아직 전투는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대장선에 타고 있던 이순신의 조카 이완은 이순신의 유언을 받아들여 자신이 이순신의 갑옷을 입고 북을 치며 전투를 진두지휘했으며, 이순신의 직속 부하였던 송희립은 분노하여 더욱 용감히 싸우다 총상을 입고 쓰러졌으나 다행히 전사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외에도 잔적을 소탕하던 도중에 흥양현감 고득장, 낙안군수 방덕룡, 가리포첨사 이영남 등이 전사할 정도로 전투는 적이 완전히 물러갈 때까지 혼전의 연속이었고, 500척에 달했던 적선 중 정오 무렵, 조명연합군의 포위망을 간신히 뚫고 살아 돌아간 배는 50척에 불과했습니다. 칠천량해전, 남원성 전투, 사천왜성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던 시마즈였으나 이순신에게는 당해내지 못했으며, 조명연합군은 노량해.. 2022. 9. 21.
[임진왜란114] 노량해전(4)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 적의 퇴로를 막아라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 노량으로 들어선 시마즈 요시히로, 소오 요시토시,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일본 수군 500척은 미리 매복해있던 조명연합 수군에게 잔뜩 두들겨맞은 후 육지로 막힌 포구인 관음포를 바다로 착각하고 사지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고니시는 그 틈을 이용하여 여수 연안을 돌아 남해 방향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이후 시마즈를 위시한 일본 함대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명나라 수군을 공격하여 활로를 열려고 했습니다. 이에 명군 선봉에 있던 부총병 등자룡이 탄 판옥선을 일본 전선이 에워쌌고, 등자룡은 포위된 상태에서도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등자룡은 전사하고 판옥선은 불타버렸습니다. 곧이어 일본군은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판옥선에도 접근했으나 이순신의 조선 .. 2022. 9. 17.
[임진왜란113] 노량해전(3) 피로 물든 노량 해협 | 붉게 물든 노량 해협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묵인 하에 고니시의 연락선 1척이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남해의 소오 요시토시, 고성의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에게 고니시의 위급함과 함께 구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면서 500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이 창선도(경남 남해군 창선면 서대리)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고니시가 있는 순천까지 가장 최단 거리인 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을 통과해 고니시와 함께 조명연합 수군을 격멸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이순신은 적선이 노량을 빠져나오는 길목에 미리 매복해 있으면서 일본군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을 따르는 군사들도 그동안 온 국토를 유린한 적을 물리칠 복수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불타오르고 있었고, 적이 .. 2022. 9. 14.
[임진왜란112] 노량해전(2) 최후의 전투를 향한 발걸음 |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 고니시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때는 1598년 11월, 추위는 이미 다가온 상태에서 보급은 끊어진 지 오래, 이대로 가다간 자멸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고니시는 어떻게든 살아날 방도를 찾으려 했습니다. 고니시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고, 그것은 남해 각지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어떻게든 구원을 요청한 뒤 그들과 함께 광양만 일대에 포위망을 형성한 조명연합군을 협공하여 이순신을 물리친 후에 철수하는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이 바닷길을 막고 있어서 먼바다로 배를 띄울 수가 없었습니다.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이 또 선봉으로 배 여러 척을 발송하는 것을 이순신이 공격하여 죽였다고 하니 행장이 진린에게 통하여 말하기를 "강화를 약속한 뒤에도 어찌하여 싸우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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