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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17

[임진왜란114] 노량해전(4)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 적의 퇴로를 막아라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 노량으로 들어선 시마즈 요시히로, 소오 요시토시,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일본 수군 500척은 미리 매복해있던 조명연합 수군에게 잔뜩 두들겨맞은 후 육지로 막힌 포구인 관음포를 바다로 착각하고 사지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고니시는 그 틈을 이용하여 여수 연안을 돌아 남해 방향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이후 시마즈를 위시한 일본 함대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명나라 수군을 공격하여 활로를 열려고 했습니다. 이에 명군 선봉에 있던 부총병 등자룡이 탄 판옥선을 일본 전선이 에워쌌고, 등자룡은 포위된 상태에서도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등자룡은 전사하고 판옥선은 불타버렸습니다. 곧이어 일본군은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판옥선에도 접근했으나 이순신의 조선 .. 2022. 9. 17.
[임진왜란113] 노량해전(3) 피로 물든 노량 해협 | 붉게 물든 노량 해협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묵인 하에 고니시의 연락선 1척이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남해의 소오 요시토시, 고성의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에게 고니시의 위급함과 함께 구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면서 500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이 창선도(경남 남해군 창선면 서대리)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고니시가 있는 순천까지 가장 최단 거리인 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을 통과해 고니시와 함께 조명연합 수군을 격멸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이순신은 적선이 노량을 빠져나오는 길목에 미리 매복해 있으면서 일본군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을 따르는 군사들도 그동안 온 국토를 유린한 적을 물리칠 복수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불타오르고 있었고, 적이 .. 2022. 9. 14.
[임진왜란111] 노량해전(1) 고니시의 뇌물 | 뇌물로 육군의 공격을 막자 1598년 9월 20일에서 10월 7일까지의 왜교성 전투로 조명연합군은 다수의 일본군과 전선을 격파했으나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으며, 왜교성과 고니시의 목을 얻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역시 성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큰 피해를 입었고, 성 일대의 육로와 수로가 포위된 채 고립된 상황은 여전했습니다. 이에 고니시는 안전한 철수를 보장받기 위해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에게 또다시 뇌물을 주었고, 유정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당장 명나라 육군의 공격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육로로 철수하기에는 유정의 서로군 외에도 중로군의 제독 동일원과 정기룡, 동로군의 제독 마귀와 김응서 등 수많은 조명연합군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뚫고 지나가기란.. 2022. 9. 7.
[임진왜란110] 순천 왜교성 전투(3) 끝을 달리는 전쟁 10월 3일,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을 받아 수륙협공 작전에 참여하지 않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단독으로 왜교성을 공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적선 30척을 격침시키고 11척을 나포하는 등 최악의 조건에서 이순신은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명나라 수군이 8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다수의 전선이 썰물에 빠져 일본군의 손에 넘어갔으며, 조선군은 위험에 빠진 명나라군을 구하려다 이순신이 탄 대장선이 썰물에 갇혔다가 겨우 빠져나올 정도로 위험천만한 상황이 있었고, 사도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등의 지휘관이 전사하며 130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전투를 장도해전이라 부르며, 결과적으로 조명연합군은 목.. 2022. 9. 4.
[임진왜란109] 순천 왜교성 전투(2) 장도해전 | 장도 해전 10월 3일, 이번에는 수로군과 서로군이 동시에 수륙 협공으로 순천 왜교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서로군의 명나라 제독 유정은 지난 전투의 패배로 전투에 더욱 소극적으로 변했고, 고니시는 협공을 두려워해 유정에게 뇌물을 주며 군대를 물려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 일을 유정은 뇌물도 받고, 군사들의 피해도 줄일 수 있는 일석이조의 상황으로 여기고 흔쾌히 응하면서 수로군만의 힘으로 왜교성을 공격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물론, 유정은 수로군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수로군은 공성병기도 없이 왜교성으로 진군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명나라 도독 진린은 고금도 통제영에서 연합을 결성한 뒤 왜교성 인근에 있는 장도에서 고니시 휘하의 수군 수십 .. 2022. 8. 31.
[임진왜란108] 순천 왜교성 전투(1) 사로병진책의 마지막 작전? 명나라 경략 형개의 사로병진 작전이 전개된 이후 조명연합군은 명나라 제독 마귀, 조선의 선거이와 김응서가 이끈(동로군) 2차 울산성 전투, 그리고 명나라 제독 동일원과 조선의 정기룡이 지휘한 사천왜성 전투(중로군)마저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함으로써 전황은 조명연합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차 울산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47 [임진왜란105] 임진왜란의 원흉! 가토의 목을 취하라! 제2차 울산성 전투 1597년 12월 23일에서 1598년 1월 4일까지 열흘에 걸친 1차 울산성 전투에서 명나라 경리 양호와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은 성의 수장이자 임진왜란의 원흉인 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취하.. 2022. 8. 28.
[임진왜란66] 제2차 진주성 전투(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광기 어린 분노 | 한양 탈환 1593년 4월 18일, 일본군이 수도 한양에서 철수한 후 남하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20일 만에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후 거의 1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때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옥포해전~웅포해전으로 이어지는 이순신 및 조선 수군의 활약과 더불어 전란 초기 패배와 도주하기에만 급급했던 관군이 의병과 합심하여 일본군에 결코 쉽게 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은 제대로 된 보급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몰아내긴 했지만, 여전히 대군이 남아있었고, 제4차 평양성 전투에서의 압도적인 화력을 맛보았던 경험 때문에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은 당시 한양에 있던 대부분의 지휘부가 모여서 공격했지만,.. 2022. 1. 19.
[임진왜란61] 행주대첩(2) 병력의 열세를 화력으로 극복하라! 일본군은 평양에서 한양으로 남하하는 명나라군을 벽제관에서 물리친 후 남쪽에서 한양으로 북상하던 조선군을 공격하기 위해 3만여 명의 병력을 7진으로 나누어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습니다. 당시 행주산성에는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이끄는 관군, 김천일의 의병, 처영의 승병을 합하여 3천여 명이 성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1593년 2월 12일, 묘시(오전 5시~7시)에 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가 1진을 맡아 성으로 접근하였습니다. 일본군이 몰려오자 조선군은 조총의 사정거리가 닿지 않는 곳에서 활을 쏘고, 변이중 화차와 신기전, 비격진천뢰와 석포까지 쏘아대니 고니시는 성벽에 접근도 못한 채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났습니다. 1진이 후퇴하자 일본군은 2진을 맡은 이시다 미츠나리가 군대를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 2022.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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