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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10

[임진왜란105] 임진왜란의 원흉! 가토의 목을 취하라! 제2차 울산성 전투 1597년 12월 23일에서 1598년 1월 4일까지 열흘에 걸친 1차 울산성 전투에서 명나라 경리 양호와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은 성의 수장이자 임진왜란의 원흉인 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취하는 것과 울산성(도산성, 현재의 학성공원)을 함락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2번이나 승기를 잡고도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목표 달성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차 울산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44 [임진왜란102] 1차 울산성전투(1) 두려움에 빠진 적을 교란하라! | 공격목표는 어디인가 육지에서의 직산 전투와 바다에서의 명량 대첩으로 북진이 좌절된 일본군은 더 이상의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고 귀국하려 했지만 도요.. 2022. 8. 17.
[임진왜란88] 황석산성 전투(1) 포위망을 좁혀오는 일본군 | 일본군의 황석산성 포위 1597년 8월 16일,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끄는 일본 좌군에 의해 남원성이 함락되었습니다. 같은 날, 모리 히데모토, 구로다 나가마사, 가토 기요마사 등이 이끄는 일본 우군의 73,700명이 황석산성(경남 함양군)에 다다랐습니다. 황석산성은 해발 1,190m의 고지를 따라 쌓은 높이 3m, 둘레 8.9km의 산성이며, 거창에서 *육십령을 넘어 전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도체찰사 이원익이 지리적 중요성을 강조했던 곳이고, 이러한 이유로 일본군의 침입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안음현감 곽준은 이원익의 지시에 따라 안음(함양군 안의면), 거창, 함양의 군사와 백성, 그리고 무기와 식량을 모두 황석산성으로 모으고 인근에 청야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 육십령 : 경남 .. 2022. 6. 19.
[임진왜란49] 북관대첩(3) 길주성 전투와 함경도 전역 탈환 국세필, 국경인, 정말수 등의 순왜 처단과 6진, 명천 지방을 회복하여 한창 기세를 드높이던 정문부와 의병들은 곧장 길주성으로 진군하여 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이후 정문부는 공성전을 전개하는 대신 앞서 장덕산 전투에서 일본군이 추위에 취약했던 점에 착안하여 성을 완전히 포위한 채 땔감을 구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영동관 책성에 주둔한 일본군이 임명촌을 공격해 노략질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정문부는 길주성 포위를 굳힌 채 일부 군사를 빼서 노략질하던 일본군 쪽으로 칼끝을 돌렸고, 수급 60두를 취했습니다. 이에 길주성과 책성에 있던 일본군은 감히 성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정문부는 책성도 함께 포위하였습니다. 1593년 1월, 안변에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는 길주와 책성의 일본군이 고립.. 2021. 12. 12.
[임진왜란48] 북관대첩(2) 매국노 처단과 장덕산, 석성령 전투 | 국경인 처단 6진 중 하나인 종성진에서 순왜의 대표 인물인 국세필을 처단하고, 여진족의 침입까지 막은 정문부는 휘하의 의병을 이끌고 국경인이 있는 회령으로 진군했습니다. 이에 앞서 정문부가 6진 곳곳에 격문을 보내 의병의 궐기를 촉구했고, 이 무렵 명나라 군대가 곧 참전할 것이고, 전란이 평정되면 순왜들을 제일 먼저 토벌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중국 군사가 곧 오게 되는데, 조정에서는 이미 북계를 역적의 소굴로 판단하고 있으니, 왜적을 평정한 뒤에는 맨 먼저 토벌할 것이다 - 만호 고경민이 함경도 백성들에게 전한 말 그러자 6진의 백성들은 정문부의 의병 부대에 앞다투어 합류했고, 회령의 유생 오윤적은 국경인을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시도하기도 전에 일이 발각되면서 오윤적은 국경인에게 .. 2021. 12. 11.
[임진왜란47] 북관대첩(1) 함경도의 영웅 정문부 해정창 전투와 국경인의 반란으로 함경도 전역을 손에 넣은 가토 기요마사는 여진족을 공격했다가 피해만입고 부하들과 순왜들에게 북쪽 변경 지방을 지키게 한 후 자신은 안변으로 내려왔습니다. 해정창 전투, 국경인의 반란, 가토 기요마사의 여진족 공격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6 [임진왜란34] 가토 기요마사의 함경도 진출을 막아라! 해정창 전투 | 일본군의 분할 진격과 조선 왕자들의 근왕병 모집 일본군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점령한 직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평안도로 진군하였고,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황해도로 진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 2021. 12. 10.
[임진왜란40] 천년의 수도 경주를 탈환하라! 1차 경주성 전투 | 경주성 함락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일본 제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동래, 언양, 울산을 거쳐 경주로 향했습니다. 이때 경주성 방어의 책임자인 경주 부윤이 윤인함에서 변응성으로 교체되었는데 윤인함은 변응성이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주해 버렸습니다. 윤인함 : 인수인계는 모르겠고 일단 살고 보자 결국 경주성은 경주 부윤이 없는 상황에서 적을 맞이하게 되었고, 경주 부윤을 대신해서 판관 박의장과 장기현감 이수일이 군사와 백성 수천 명을 동원하여 경주성을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일본군이 도달하기도 전에 모두 도망갔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빨리 도망간 사람이나 나중에 도망간 사람이나 다를 것 없다 이렇게 경주성을 지키는 조선군은 아무도 없었고, 일본군이 무혈.. 2021. 11. 29.
[임진왜란37] 빼앗긴 성을 돌려받으러 왔다! 영천성 전투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4월 22일에는 일본 제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에 의해 경북 영천이 점령당했습니다. 당시 영천성은 영천 군수 김윤국이 지켜야 했으나 일본군이 나타나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하면서 성은 그대로 함락되었고, 일본군은 무혈입성하였습니다. | 영천성 탈환 작전과 창의정용군 일본군은 영천성에 1천여 명을 남겨둔 채 본대는 그대로 북진했는데 남아있던 일본군이 약탈을 자행하자 백성들은 분개하였고, 4월 27일, 영천 지역에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권응수를 대장으로 추대한 뒤 영천성 탈환을 위한 작전을 전개합니다. * 권응수 : 경북 영천 출신으로, 경상좌수사 박홍의 부하였으나 박홍이 전함을 자침시키고 도망치자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가 의병을 일으켰.. 2021. 11. 24.
[임진왜란35] 국경인의 반란과 임해군, 순화군의 악행 | 가토 기요마사의 함경도 점령 7월 17일~18일의 해정창 전투에서 조선군이 궤멸당하자 더이상 자신을 막을 군대가 없다고 판단한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 제2군은 다시 빠른 속도로 진군하여 경성과 부령을 지나 7월 22일에는 임해군과 순화군이 피신해있는 회령 인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때 해정창 전투에서 패하고 경성으로 퇴각해있던 한극함은 가토 군대가 경성으로 오기 전에 국경을 넘어 여진족이 있는 부락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 국경인의 반란 7월 23일, 가토의 군대는 회령진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회령의 아전이었던 *국경인이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의 악행과 자신이 회령으로 유배된 것에 원한을 품고 백성들을 선동하여 조선 조정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 여기서 국경인은 사람 이름이지 국경에 있는 사람을 일컫지.. 2021.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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