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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7

발해 사신이 경악하고 일본인들이 부러워한 발해의 사치품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담비 가죽은 모피로 이용되어 매우 귀하게 여겨져왔고, 그것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발해의 특산품 중 하나였던 담비 가죽은 발해와 교류가 활발했던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며 지배층의 주요 사치품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값이 비싼 데다가 공급에 비해 수요가 너무 컸기 때문에 담비 가죽을 걸치고 있다는 것은 고귀한 신분임을 드러내는 표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919년에는 담비 가죽에 대한 웃지못할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 건너간 발해 사신단 일행은 연회에 참석한 뒤 한 일본인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때는 여름이었기 때문에 날씨가 매우 더웠는데도 그 일본인은 왕족이라는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담비 가죽으로 만들어진 옷 여덟 벌을 걸치고 있었.. 2023. 5. 31.
발해가 우리나라 역사인 이유 https://youtu.be/n7T4siaxOMk 고구려가 우리나라 역사인 것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지만 발해가 우리나라 역사인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거나 부정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발해(대진국)가 우리나라 역사인 이유 7가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이 고구려의 별종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세력이 부여의 별종인 것처럼 발해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계승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발해의 2대 왕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이어받았다' 라고 말하며 고구려 계승 의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셋째로, 발해가 고구려의 땅만 회복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사용했던 온돌을 사용했다는 것과 기와.. 2021. 9. 28.
발해의 또다른 시작! 발해부흥운동 https://youtu.be/uU7UHdDmivM 이번 시간에는 발해 멸망 후 이어진 발해부흥운동(후발해, 정안국, 흥요국, 대발해국)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 후발해의 역사 925년 요나라(거란족)의 침입으로 926년에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가 함락되면서 발해는 멸망하였습니다. 발해의 멸망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 발해는 왜 멸망했을까? https://youtu.be/QtCcFjkpgXU 이번 시간에는 발해의 멸망과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발해의 10대 왕인 선왕이 무너져가던 발해를 일으켜 세워 전성기를 이룩했고(해동성국) 11대 왕인 대이진과 1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요 태.. 2021. 7. 29.
발해는 왜 멸망했을까? https://youtu.be/QtCcFjkpgXU 이번 시간에는 발해의 멸망과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발해의 10대 왕인 선왕이 무너져가던 발해를 일으켜 세워 전성기를 이룩했고(해동성국) 11대 왕인 대이진과 12대 왕인 대건황까지 그 기세는 이어졌다고 합니다. 발해의 전성기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5 해동성국 발해의 전성기 https://youtu.be/7VsMYXEnVKU | 선왕 대인수의 즉위 818년 발해의 9대 왕인 간왕이 죽자 대인수가 10대 왕(선왕)으로 즉위하였고 연호를 '건흥'(建興)이라고 제정하였습니다. 연호의 뜻에서 알 수 있듯이 historicalhistory.tistory.com | 발해.. 2021. 7. 28.
해동성국 발해의 전성기 https://youtu.be/7VsMYXEnVKU | 선왕 대인수의 즉위 818년 발해의 9대 왕인 간왕이 죽자 대인수가 10대 왕(선왕)으로 즉위하였고 연호를 '건흥'(建興)이라고 제정하였습니다. 연호의 뜻에서 알 수 있듯이 선왕은 약해지던 발해를 다시 일으켜 세울 큰 뜻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발해는 793년에 3대 왕인 문왕의 집권 시기까지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으나 문왕 사후에는 25년 동안 6대 왕인 강왕을 제외한 4대 왕 대원의부터 9대 왕인 간왕까지 재위 기간 5년을 넘기지 못하고 단명하는 혼란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2대 왕인 무왕 시기 위풍당당하게 당나라를 공격하여 당나라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위용(등주 전투, 마도산 전투)은 온데간데없이 복속되어있던 말갈족의 이탈을 방.. 2021. 7. 27.
신생국 발해와 최강대국 당나라의 전면전 https://youtu.be/8MSjJeiWzhQ | 발해 무왕의 즉위 719년,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이 죽자 그의 아들인 대무예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고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제정했습니다. 이후 발해 무왕(발해 2대 왕, 대무예)은 대외 확장을 하여 발해 주변에 위치한 여러 나라를 복속시키며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이때 일본에 보낸 국서에는 “여러 나라를 아우르고 여러 번국을 감독하니 고구려의 옛 거주지를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지녔다.” 라고 표현하였고 [신당서]에는 발해가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의 모든 이민족이 겁을 먹고 그를 섬겼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당나라와 흑수말갈의 연합 발해가 이처럼 대외적으로 국력을 신장시키자 발해의 동북쪽에 위치한 흑수말갈과 당나.. 2021. 7. 26.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일대기 https://youtu.be/pKAqd2Th6LA | 연개소문의 죽음과 고구려의 분열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은 대막리지의 자리를 놓고 내전을 벌이면서 고구려의 상황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결국,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연남생(연개소문의 첫째 아들)은 조국을 배신하고 당나라에 투항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연남생이 거느리고 있던 고구려에 복속 중인 말갈과 거란족, 그리고 고구려의 성과 백성들까지 수십만 명에 이르는 행렬까지 당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당 태종 이세민(당나라의 2대 황제) 시절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집요하게 공격했고, 이전의 수나라와는 달리 고구려의 주요 성인 요동성, 백암성, 개모성, 비사성 등을 함락시키며 파죽지세로 밀고 나갔지만 안시성에서 안.. 2021.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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