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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6

임진왜란 때 적과 가장 가까우면서 안전했던 곳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많은 백성들은 왜적의 공격을 피하고자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잘 훈련된 군대와 거북선을 앞세워 연전연승 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었고, 제해권을 확보했습니다. 이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강화가 진행되고, 교착상태가 지속되자 조선 수군은 한산도에 삼도(경상도ㆍ전라도ㆍ충성도)의 수군을 관할하는 전진기지(삼도수군 통제영)를 구축하면서 일본 수군과 지근거리에서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싸울 때마다 승리하는 조선 수군을 보며 최전방인 통제영 인근에 정착하는 사람이 많았고, 진주대첩의 소식이 알려진 진주성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진주대첩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 2023. 5. 30.
[임진왜란93] 13척 vs 13척! 벽파진해전 1597년 8월 18일,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에게서 12척의 판옥선을 인계받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8월 26일에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합류로 판옥선 1척이 더 확보되어 조선 수군은 13척의 판옥선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8월 27일 새벽, 적선 8척이 접근해오자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아군의 사기가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이순신의 진두지휘로 적을 물리쳤습니다. (어란포해전) 그러나 뒤이어 50여 척의 적선이 다가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한 이순신은 어란포에서 장도로, 8월 29일에는 장도에서 진도 고군면의 벽파진으로 진영을 옮겼습니다. | 경상우수사 배설의 탈영 그런데 9월 2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탈영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배설은 일전에 칠천량해전에서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전장.. 2022. 7. 6.
[임진왜란92]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 수군을 폐하라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뒤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부임 된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의 보고를 접한 그 날부터 남쪽으로 내려가 흩어진 군사와 군수품을 모았고,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12척의 전선을 인계받아 비로소 수군이라 할 수 있는 형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순신이 다시 군사들을 모아 수군 재건에 박차고 있을 무렵, 조정에서 한 통의 조서를 받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수군을 권율 휘하의 육군으로 편입시켜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싸우라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이는 한 줌밖에 없는 군사와 전선으로 어떻게든 일본군에게 수로를 내주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던 이순신에게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었으며, 조선이 바다를 내준다면 일본 수군은.. 2022. 7. 3.
[임진왜란84] 절망에서 희망으로! 수군 재건에 나서는 이순신 7월 16일의 칠천량 해전과 뒤이은 원균의 실책으로 100척이 넘는 판옥선 중 절반 이상과 귀선(거북선) 3척이 모두 격침되었고, 이순신의 휘하에서 불패의 신화를 자랑했던 노련한 군사들은 죽거나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에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시절 숨죽이고 왜성에 틀어박힌 채 해전 자체를 두려워했던 일본군은 위의 해전으로 거칠 게 없어지자 천하의 요새 견내량을 넘어 한산도 통제영을 접수하고 인근을 노략질하였습니다. 이때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이 벌어진 이틀 후인 7월 18일, 조선 수군의 대패를 보고받자마자 권율과 향후 대책을 논의 후 9명의 군관과 6명의 병사와 함께 초계를 지나 단성, 진주, 곤양, 노량을 지나면서 거제 현령 안위, 경상우수사 배설 등의 패잔.. 2022. 6. 4.
[임진왜란76] 강화 회담의 결렬과 이순신의 파직 1592년에 발발했던 임진왜란은 벌써 여러 해를 넘겨 1597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는 계속 진행 중이었고, 그러는 동안 일본군은 남해안 연안 곳곳에 왜성을 쌓아 혹시라도 진군해올지 모르는 조선 수군을 방비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은 지난 임진년 때처럼 여러 차례 일본군을 공격하러 나서기 어려웠고, 일본군 역시 조선 수군과 싸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은 서로 대치한 채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 강화 회담의 결렬 그러던 중 명나라 경락 송응창은 강화의 조건으로 크게 3가지를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일본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 두 번째는 국경인이 넘겨준 조선의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송환할 것 세 번째는 전.. 2022. 2. 14.
[임진왜란29] 급변하는 전황! 한산도 대첩의 결과와 평가 | 한산도 대첩의 결과 한산도 대첩으로 조선 수군은 부산을 제외한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확보하였으며, 이 시기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 제6군의 전라도 진출마저 좌절되면서 수륙 양면에서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원천봉쇄하였습니다. * 웅치, 이치, 안덕원, 금산 전투를 치르면서 일본 제6군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곡창지대였던 호남 지방이 보존되면서 전라도가 병참기지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계획했던 수륙병진 작전이 완전히 물거품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을 만나기만 하면 패배하는 일본 수군을 보고 "더는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고 해안에 성을 쌓아 방어에 주력하라" 라는 해전 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했으니 당시 일본.. 2021.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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