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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수 권율6

[임진왜란104] 1차 울산성전투(3) 최악의 상황에서 다가온 구원의 손길 | 가토를 구하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 12월 28일, 공성전을 시작한 지 6일째 되던 날, 조명연합군은 공세를 재개하였고, 울산성 외성을 재점령하였습니다. 가토는 또다시 내성으로 몰리며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고, 내성에서도 벼랑 끝까지 몰리자 가토는 부상병들까지 동원하여 맞섰으나 이마저도 여의치않자 할복을 준비하니 조명연합군은 이제야말로 승기를 굳히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방에서 가토를 구원하기 위한 지원군이 나타났고, 조명연합군은 성을 공격하는 병력을 줄이고 지원군을 상대하게 했지만, 지원군의 숫자는 계속 늘어 나베시마 나오시게,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비롯한 수많은 장수들과 그리고 가토와 철천지 원수이자 울산성과 거리도 가장 멀었던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까지 병력을 이끌고 오니 그 수가 수만.. 2022. 8. 13.
[임진왜란103] 1차 울산성전투(2) 결정적 승리를 놓친 조명연합군의 고사 작전 | 울산성전투 공방전 당시 울산성(도산성)은 일본군이 100년에 걸친 전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발전시킨 축성술을 그대로 담았고, 오로지 성의 방어 기능만을 극대화시킨 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군은 외부의 지원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조명연합군의 맹렬한 포격과 압도적인 병력 앞에 무너져내렸고, 특히 대완구에 비격진천뢰를 넣어 발사하자 밀집해있던 일본군이 그대로 즉사하는 등 엄청난 화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맞서 일본군이 고지대에서 성벽을 오르는 조선군과 명나라군을 향해 조총 사격을 가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으나 계속된 공격 끝에 울산성의 외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전투의 향방이 제4차 평양성 전투와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된 것이었습니다. 4차 평양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 2022. 8. 10.
[임진왜란80] 도원수 권율에게 곤장을 맞는 원균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부산포 공격에 30만 육군이 필요하다는 장계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당연히 그 요청을 들어줄 순 없었고 대신 도원수 권율 휘하의 육군 5천여 명을 수군으로 배속시켜 주었습니다. 지난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인 시절에는 수군 진영의 병사들을 육군으로 배속시켰던 일이 있었으니 선조가 원균을 얼마나 총애했는지, 그리고 원균에 대한 기대감이 얼마나 컸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원균은 일부 병력을 지원받게 되었고, 계속되는 출전 압박에 부산포로 출정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1597년 6월 18일, 원균은 출정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적선 두 척을 불태웠을 뿐 연안에 늘어선 왜성에서의 포격과 일본 수군의 저항으로 보성군수 안흥국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습니다. 이를 당.. 2022. 2. 27.
[임진왜란72]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의 수륙 합동작전! 장문포 해전 제2차 당항포 해전 이후 조선ㆍ명나라, 일본 사이에는 교전다운 교전이 없었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는 강화 교섭이 이루어져 휴전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하루빨리 조선 땅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싶었고, 명나라의 참전 목적은 전장이 명나라 영토까지 확대되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했다 생각한 나머지 전투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더이상의 피해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조선 조정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명나라 대신 조선의 힘으로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했으며, 선조는 좌의정 윤두수를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윤두수는 영남과 호남의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거제도의 일본군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2022. 2. 3.
[임진왜란69]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 | 난공불락 진주성의 함락 제2차 진주성 전투는 6천의 관군과 의병이 9만 3천의 일본군을 맞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 동안 격전을 펼쳤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상황은 행주대첩과 웅포해전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데 이어 의병 활동으로 보급로가 계속 차단이 되자 일본군은 한양을 버리고 경상도 남해안 방면까지 밀린 상황에서 명나라와의 강화 회담 중이었음에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그리고 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에서 대패했던 것을 설욕하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력한 지시 때문에 일어났던 이 전투의 결과는 매우 참혹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을 함락시키면 진주성 내의 사람은 물론이고 개나 고양이 할 것 없이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기 때문에 진주성에.. 2022. 1. 28.
[임진왜란67]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2)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 교섭으로 휴전 기간이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압적인 명령으로 일본군은 6월 15일에 함안, 16일에 반성, 18일에는 의령까지 점령하면서 점차 진주성 쪽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 군대의 규모만 해도 9만 3천에 이르렀으며, 이는 이순신과 대치 중인 일본 수군과 부산 등의 전략적 거점을 수비할 일부 일본군을 제외한 모든 전력을 진주성에 쏟아부으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들을 이끄는 지휘관은 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 3군 선봉장 구로다 나가마사, 4군 선봉장 모리 요시나리의 휘하 시마즈 요시히로, 6군 선봉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7군 선봉장 모리 데루모토를 대신한 모리 히데모토, 8군 선봉장이자 일본군의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 훗날 세키가하라 전.. 2022.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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