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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휴전5

[임진왜란79] 기문포 해전의 전말과 원균의 실상 | 기문포 해전의 전말 3월 9일에 벌어진 기문포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했으나 아군의 피해는 이보다 더 큰 14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개전 이래 처음으로 판옥선 1척이 격침되었습니다. 원균이 이 해전의 장계를 보내자 비변사는 전투 경과를 조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균의 비열한 행동이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참모 요시라 사이에서 일본군이 거제도 일대에서 나무를 해도 된다는 약조가 체결된 상태였고, 지난 해전에서 죽인 일본군이 그들이었던 것입니다. 아래는 비변사와 선조의 대화입니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원균이 바친 수급이 만약 나무를 베러 왕래하는 왜라면 쳐들어와서 사람을 죽인 왜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장을 독려하여 역전, 참획.. 2022. 2. 21.
[임진왜란78]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의 첫 출전! 기문포 해전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친척이었던 안중홍이 찾아와 대화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원균이 "제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라고 말하자 안중홍은 "적을 무찔러서 이순신보다 더 큰 공을 세워야 진짜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지, 겨우 이순신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소?"라고 답하니 원균은 "멀리서 싸울 땐 편전을 쏘고 가까이서 싸울 땐 칼과 몽둥이를 쓰면 됩니다"(!)라고 받아치니 원균이 돌아간 이후 안중홍은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 일을 하기는 글렀다. *조괄과 *기겁도 저 정도는 아닐 것이다"라며 크게 탄식하였다. - 안방준 [은봉전서] * 조괄 :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조나라 병사 45만을 잃은 지휘관 * 기겁 .. 2022. 2. 19.
[임진왜란74] 이몽학의 난(2) 홍주목사 홍가신의 활약 | 빠른 속도로 번져가는 난의 불길 이몽학이 난을 일으켜 홍산과 임천(충남 부여군)을 단숨에 함락시키자 실의에 빠져있던 백성들은 앞다투어 이몽학의 무리에 가담하기 위해 앞다투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7월 7일에 정산현(충남 청양군)에, 8일에는 청양현에 다다랐고, 이들을 막아야 할 정산현감 정대경과 청양현감 윤승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모두 도망가니 두 고을은 모두 반란군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반란군은 기세를 이어 9일에는 대흥군(충남 예산군)을 공격했는데 대흥군수 이질수 역시 산중으로 도망가면서 대흥군 역시 손쉽게 함락되었고, 반란군의 위세는 날로 커져만 갔습니다. 이처럼 관군들은 반란군에 전혀 대항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부여현감 허수겸과 서산군수 이충길은 쳐들어 온 반란군을 도와주기까지 하는.. 2022. 2. 9.
[임진왜란73] 위기를 기회로! 이몽학의 난(1) | 점점 궁핍해지는 백성들의 삶 1596년 7월, 1592년 4월에 시작되었던 임진왜란은 종전도 아닌 휴전에 접어든 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징집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해 경작지가 많이 황폐해졌으니 흉년이 들어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조세는 매우 큰 부담이었습니다. 거기다 주둔 중인 명나라 군대를 먹여 살릴 식량도 마련해야 했던 반면, 명군은 자국의 땅까지 전장이 확대되지 않은 것에만 만족하고 싸울 뜻이 없었으며, 오히려 점령군 행세를 하며 소, 닭, 돼지 등의 가축을 마음대로 약탈하고 처자들을 겁탈하기도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이를 두고 "명군은 참빗, 왜군은 얼레빗" 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일부 군대의 행패는 일본군이 자행했던 것 이상이었으며, 참빗은.. 2022. 2. 7.
[임진왜란66] 제2차 진주성 전투(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광기 어린 분노 | 한양 탈환 1593년 4월 18일, 일본군이 수도 한양에서 철수한 후 남하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20일 만에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후 거의 1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때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옥포해전~웅포해전으로 이어지는 이순신 및 조선 수군의 활약과 더불어 전란 초기 패배와 도주하기에만 급급했던 관군이 의병과 합심하여 일본군에 결코 쉽게 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은 제대로 된 보급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몰아내긴 했지만, 여전히 대군이 남아있었고, 제4차 평양성 전투에서의 압도적인 화력을 맛보았던 경험 때문에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은 당시 한양에 있던 대부분의 지휘부가 모여서 공격했지만,.. 2022.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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