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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7

[임진왜란69]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 | 난공불락 진주성의 함락 제2차 진주성 전투는 6천의 관군과 의병이 9만 3천의 일본군을 맞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 동안 격전을 펼쳤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상황은 행주대첩과 웅포해전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데 이어 의병 활동으로 보급로가 계속 차단이 되자 일본군은 한양을 버리고 경상도 남해안 방면까지 밀린 상황에서 명나라와의 강화 회담 중이었음에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그리고 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에서 대패했던 것을 설욕하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력한 지시 때문에 일어났던 이 전투의 결과는 매우 참혹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을 함락시키면 진주성 내의 사람은 물론이고 개나 고양이 할 것 없이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기 때문에 진주성에.. 2022. 1. 28.
[임진왜란49] 북관대첩(3) 길주성 전투와 함경도 전역 탈환 국세필, 국경인, 정말수 등의 순왜 처단과 6진, 명천 지방을 회복하여 한창 기세를 드높이던 정문부와 의병들은 곧장 길주성으로 진군하여 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이후 정문부는 공성전을 전개하는 대신 앞서 장덕산 전투에서 일본군이 추위에 취약했던 점에 착안하여 성을 완전히 포위한 채 땔감을 구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영동관 책성에 주둔한 일본군이 임명촌을 공격해 노략질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정문부는 길주성 포위를 굳힌 채 일부 군사를 빼서 노략질하던 일본군 쪽으로 칼끝을 돌렸고, 수급 60두를 취했습니다. 이에 길주성과 책성에 있던 일본군은 감히 성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정문부는 책성도 함께 포위하였습니다. 1593년 1월, 안변에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는 길주와 책성의 일본군이 고립.. 2021. 12. 12.
[임진왜란43] 철저한 준비만이 살 길이다! 영원산성 전투 일본 제4군 선봉장 모리 요시나리의 군대는 강원도 점령을 목표로 하였고, 1592년 7월, 삼척, 정선, 영월, 평창을 차례로 점령한 후 원주로 향했습니다. 이에 원주 목사 김제갑은 군민 4천여 명과 함께 1달 치 군량을 갖고 원주의 영원산성에서 적을 막기로 하였습니다. * 김제갑이 보유했던 군량은 이보다 훨씬 많았으나 이전에 삼도순변사 신립이 충주 탄금대에서 싸울 때 무기와 군량을 많이 지원해 준 일이 있었기 때문에 1달치 밖에 보유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충주 탄금대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49 [임진왜란7] 일본군 조총병과 조선 기마부대의 회전! 탄금대 전투 https://youtu.be/1jEAWJFhjrg.. 2021. 12. 4.
[임진왜란40] 천년의 수도 경주를 탈환하라! 1차 경주성 전투 | 경주성 함락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일본 제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동래, 언양, 울산을 거쳐 경주로 향했습니다. 이때 경주성 방어의 책임자인 경주 부윤이 윤인함에서 변응성으로 교체되었는데 윤인함은 변응성이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주해 버렸습니다. 윤인함 : 인수인계는 모르겠고 일단 살고 보자 결국 경주성은 경주 부윤이 없는 상황에서 적을 맞이하게 되었고, 경주 부윤을 대신해서 판관 박의장과 장기현감 이수일이 군사와 백성 수천 명을 동원하여 경주성을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일본군이 도달하기도 전에 모두 도망갔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빨리 도망간 사람이나 나중에 도망간 사람이나 다를 것 없다 이렇게 경주성을 지키는 조선군은 아무도 없었고, 일본군이 무혈.. 2021. 11. 29.
[임진왜란36] 가토 기요마사의 여진족 공격과 지옥에 빠진 함경도 7월 17일~18일에 벌어진 해정창 전투에서 한극함이 이끄는 6진의 정예병력과 함경도 남병사 이영의 군대가 궤멸되면서 함경도를 수비할 병력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함경북도 회령에서 국경인이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과 순화군을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기면서 함경도 전역은 가토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토는 국경인과 국세필, 정말수 등에게 일부 지역의 통치를 맡긴 뒤 두만강을 넘어 여진족을 공격하려 했습니다. | 여진족은 누구인가? 여진족은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 때 고구려와 발해에 각각 복속되어 있었고,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거란족에 복속되어 있다가 거란족이 세운 나라인 요나라가 멸망할 때쯤 금나라를 세워 중국의 절반을 차지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몽골족에게 금나라가 멸망하면서 다시 복.. 2021. 11. 23.
[임진왜란26] 영남 3대 의병장의 우척현 전투 | 일본 제6군의 전라도 공격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 제1군이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 제2군이 함경도로 진출할 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 제6군은 전라도 점령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는 곽재우의 의병에게 정암진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후 이치와 웅치 고개를 넘어서 전주성으로 향하려 했으나 이치는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끄는 조선군의 저항에 가로막혀 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웅치는 의병장 황박과 정담, 이복남의 관군이 뚫리긴 했으나 웅치에서 살아남은 조선군과 황진의 활약으로 안덕원에서 패배하면서 금산으로 퇴각했고, 거기다 고경명의 의병과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이 금산성을 공격하기까지 했으니 고바야카와의 군대는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전라도 공격.. 2021. 11. 10.
[임진왜란25] 이치 전투의 결과와 영향 이치 전투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승리로 기울어갈 때쯤 종횡무진 활약했던 동복현감 황진이 이마에 총탄을 맞아 후송되었고, 의병장 황박마저 전사하면서 조선군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선군 진영의 혼란을 틈타 일본군이 성채로 뛰어들어오니 그동안 잘싸웠던 조선군에게 위기가 닥쳐 전황은 다시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러자 전투를 총지휘하던 광주목사 권율이 직접 칼을 빼들고 뒤를 보이는 병사들을 베어버렸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병을 베면서 전투를 독려하니 조선군의 사기가 다시 올라가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전장에 위기가 닥쳤을 때 지휘관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1차로 5월의 정암진 전투, 2차로 7월에 벌어진 웅치 전투와 .. 2021.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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