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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키자카 야스하루7

[임진왜란81] 한국사 최악의 해전! 칠천량해전(1) | 원균의 자업자득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지난 출정으로 적선 10척을 깨트렸으나 판옥선은 그보다 훨씬 많은 32척을 잃으면서 전임 통제사였던 이순신과는 180도 다른 성과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원균은 이제 와서 부산포 출정이 불가하다며 말을 번복했고, 이순신이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기 위해 만든 운주당에서 기생을 끼고 술을 퍼마시는 추태를 부렸습니다. 이에 화가 난 도원수 권율이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원균에게 곤장을 쳤습니다. 그러자 원균은 분을 못 이겨 전 함대를 이끌고 출정에 나섰습니다. * 도원수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치고 출정을 강요하여 조선 수군을 사지(死地)로 밀어 넣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곤장을 친 이유는 원균이 지난 장계에서 자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면 부산포를 공격하여 적을 섬.. 2022. 3. 8.
[임진왜란45] 적의 본진에서 벌어진 양측의 총력전! 부산포해전 | 부산포 해전 8월 29일에서 9월 1일 사이의 *6차례 해전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부산포로 진입하기 전 적의 기선을 완전히 제압한 조선 수군은 *장사진을 펼쳐 부산진 포구로 진입하였습니다. * 장림포, 화준구미, 서평포, 다대포, 절영도, 초량목 해전 * 장사진 : 함대를 뱀처럼 길게 늘어세우는 진법 당시 부산포에 정박해 있던 적선은 무려 470여 척으로, 지금까지 이순신이 물리친 적선의 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훨씬 큰 규모였습니다. 게다가 부산포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카쓰, 한산도에서 무참피 패했으나 용인 전투에서는 1,600명으로 8만의 조선군을 패퇴시킨 와키자카 야스하루, 일본 센코쿠 시대에서 해전으로 이름을 날린 구키 요시타카, 그리고 도도 다카토라까지 쟁쟁한 인물들이.. 2021. 12. 6.
[임진왜란31] 부산 인근까지 다다른 조선 수군! 이순신의 3차 출정 성과 | 이순신의 3차 출정 성과 7월 6일에 다시 한번 연합함대를 결성하여 3차 출정에 나선 조선 수군은 7월 8일에 한산도에서, 7월 10일에 안골포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2번의 해전을 통해 적선 총 70여 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나포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조선 수군은 부산 인근까지 제해권을 넓혔고, 일본 수군은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부산조차도 머지않아 공격받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공으로 전투를 총괄한 이순신은 정헌대부(정2품)으로,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원균은 가의대부(종2품)으로 승진하였습니다. * 7척밖에 없던 원균에게 25척을 이끈 이억기와 같은 포상을 한 점은 아쉽습니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탈출 시도 한편, 한산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2021. 11. 18.
[임진왜란29] 급변하는 전황! 한산도 대첩의 결과와 평가 | 한산도 대첩의 결과 한산도 대첩으로 조선 수군은 부산을 제외한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확보하였으며, 이 시기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 제6군의 전라도 진출마저 좌절되면서 수륙 양면에서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원천봉쇄하였습니다. * 웅치, 이치, 안덕원, 금산 전투를 치르면서 일본 제6군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곡창지대였던 호남 지방이 보존되면서 전라도가 병참기지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계획했던 수륙병진 작전이 완전히 물거품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을 만나기만 하면 패배하는 일본 수군을 보고 "더는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고 해안에 성을 쌓아 방어에 주력하라" 라는 해전 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했으니 당시 일본.. 2021. 11. 14.
[임진왜란28] 한산도 대첩!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다! 한산도에 펼쳐진 학의 날개 https://youtu.be/htWDDIt-qD8 | 한산도 대첩 7월 8일, 조선 수군은 5~6척의 판옥선이 *견내량으로 진격하여 정박해있던 일본 수군을 향해 화포를 발사했습니다. * 견내량 :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경남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사이의 해협 소수의 전선으로 피해를 줌으로써 일본군을 자극하기엔 충분했고, 전공을 세울 욕심에 들떠있던 와키자카는 큰 의심 없이 미끼를 물어 조선 수군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함대는 첨저선이었으므로 평저선인 조선의 판옥선에 비해 속도가 매우 빨랐기 때문에 퇴각하는 판옥선에 빈틈을 주지 않고 따라붙은 후 조총을 쏘며 싸움을 걸었습니다. * 첨저선은 선체의 바닥이 뾰족한 선박으로 저항을 적게 받아 속력이 빠르나 선회하기 어렵고, 화.. 2021. 11. 13.
[임진왜란18] 조선 최악의 전투! 용인 전투 https://youtu.be/x582iYHooDQ | 군사 수가 전투의 모든 것은 아니었으니.. 6월 5일의 전투로 삼도근왕군의 사기는 매우 떨어졌고, 이광(전라도순찰사이자 삼도근왕군의 맹주)은 진을 옮기기 전에 지형이 어떤지 탐지해보자는 윤선각(윤국형이라고도 하며, 충청도순찰사)의 조언을 듣지 않고 신시(오후 3시~5시)에 진을 광교산 근처로 옮겼습니다. * 광교산 : 현재의 수원시와 용인시에 걸쳐있는 산으로, 광교신도시가 인근에 있습니다. * 6월 5일의 전투는 용인 전투의 일부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59 [임진왜란17] 8만의 군사를 동원한 조선! 반격의 서막이 될 것인가? | 조선! 개국 이래 최대.. 2021. 10. 30.
[임진왜란17] 8만의 군사를 동원한 조선! 반격의 서막이 될 것인가? | 조선! 개국 이래 최대 규모의 군사 결집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후 초기에는 일본군에게 패하거나 도주하기 바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 한양까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활약으로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았고, 육지에서는 곽재우를 필두로 한 의병들이 궐기하면서 일본군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습니다. 거기다 조선 관군(육군)들도 반격을 가하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으니... 하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최고 지휘관들이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평택에 모였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수군만 연합하는게 아니라구~ 스스로를 삼도근왕군이라 칭한 이들의 규모만 해도 전라도관찰사 이광(삼도근왕군의 맹주)의 군사 4만과 전라도방어사 곽영의 군사 2만,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군사 수백 명, 충.. 2021.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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