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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8

[임진왜란92]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 수군을 폐하라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뒤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부임 된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의 보고를 접한 그 날부터 남쪽으로 내려가 흩어진 군사와 군수품을 모았고,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12척의 전선을 인계받아 비로소 수군이라 할 수 있는 형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순신이 다시 군사들을 모아 수군 재건에 박차고 있을 무렵, 조정에서 한 통의 조서를 받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수군을 권율 휘하의 육군으로 편입시켜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싸우라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이는 한 줌밖에 없는 군사와 전선으로 어떻게든 일본군에게 수로를 내주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던 이순신에게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었으며, 조선이 바다를 내준다면 일본 수군은.. 2022. 7. 3.
[임진왜란90] 직산 전투(1) 일본군의 북상과 명군의 남하 | 일본군의 북상과 명군의 남하 황석산성을 함락시킨 일본 우군은 전주에서 일본 좌군과 합류한 후 승세를 타고 공주, 진천을 거쳐 북상하고 있었고, 그중 선봉대인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는 직산(충남 천안시 직산읍)까지 당도하였습니다. 이렇게 일본군이 다시 무서운 기세로 북상하자 일부 백성들은 피난을 갔으며, 조정에서는 또다시 파천(수도를 옮김)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정도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에 선조는 평양에 머물던 명나라 경리 양호에게 여러 차례 출병을 간청하였고, 양호는 날랜 기병을 선발하여 부총병 해생을 비롯해 참장 양등산, 유격장 우백영과 파귀 등에게 군사 2천을 보내 남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유격장 파새가 정병 2,000명을 거느리고 뒤를 이었습니다. | 직산 .. 2022. 6. 26.
[임진왜란89] 황석산성 전투(2) 백사림의 도주와 피로 물든 바위 | 백사림의 도주, 그리고 붕괴 조선군은 높고 험준한 곳을 따라 유리한 지형을 끼고 싸우고 있었지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이 몰려드는 일본군 정예병을 당해낼 수 없었고, 전황이 점점 조선군에 불리해지자 전임 김해부사 백사림은 자기 가족을 먼저 성 밖으로 빼낸 뒤 자신도 성문을 열고 도망쳤습니다. 그러자 일본군이 북문을 통해 벌떼같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가뜩이나 불리했던 상황에서 성문까지 열리자 황석산성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 성문을 연 백사림과 그 가족이 살아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성문을 열어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일본군과의 밀약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결국, 목숨을 걸고 싸우던 군민들은 쏟아지는 일본군을 보고 동요하여 가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 2022. 6. 22.
[임진왜란88] 황석산성 전투(1) 포위망을 좁혀오는 일본군 | 일본군의 황석산성 포위 1597년 8월 16일,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끄는 일본 좌군에 의해 남원성이 함락되었습니다. 같은 날, 모리 히데모토, 구로다 나가마사, 가토 기요마사 등이 이끄는 일본 우군의 73,700명이 황석산성(경남 함양군)에 다다랐습니다. 황석산성은 해발 1,190m의 고지를 따라 쌓은 높이 3m, 둘레 8.9km의 산성이며, 거창에서 *육십령을 넘어 전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도체찰사 이원익이 지리적 중요성을 강조했던 곳이고, 이러한 이유로 일본군의 침입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안음현감 곽준은 이원익의 지시에 따라 안음(함양군 안의면), 거창, 함양의 군사와 백성, 그리고 무기와 식량을 모두 황석산성으로 모으고 인근에 청야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 육십령 : 경남 .. 2022. 6. 19.
[임진왜란86] 남원성 전투(1) 사나이 국은을 갚을 때가 이 날이 아닌가! | 일본군의 전라도 재침공 계획 지난 임진년(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개전 초반, 일본군이 승승장구하며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하였으나 결정적 승리를 얻지 못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결국에는 남쪽으로 밀려난 원인이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물리치지 못해 보급에 차질을 빚었던 것과 곡창지대였던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데 있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후 1597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라도 침략을 지시하였습니다. (정유재란) 이에 일본군은 14만의 병력을 좌군과 우군, 이렇게 둘로 나누어 우군은 총사령관을 모리 히데모토로 삼고, 임진왜란 때 2군과 3군 선봉장을 맡았던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을 포함하여 총병력 73,.. 2022. 6. 12.
[임진왜란84] 절망에서 희망으로! 수군 재건에 나서는 이순신 7월 16일의 칠천량 해전과 뒤이은 원균의 실책으로 100척이 넘는 판옥선 중 절반 이상과 귀선(거북선) 3척이 모두 격침되었고, 이순신의 휘하에서 불패의 신화를 자랑했던 노련한 군사들은 죽거나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에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시절 숨죽이고 왜성에 틀어박힌 채 해전 자체를 두려워했던 일본군은 위의 해전으로 거칠 게 없어지자 천하의 요새 견내량을 넘어 한산도 통제영을 접수하고 인근을 노략질하였습니다. 이때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이 벌어진 이틀 후인 7월 18일, 조선 수군의 대패를 보고받자마자 권율과 향후 대책을 논의 후 9명의 군관과 6명의 병사와 함께 초계를 지나 단성, 진주, 곤양, 노량을 지나면서 거제 현령 안위, 경상우수사 배설 등의 패잔.. 2022. 6. 4.
[임진왜란81] 한국사 최악의 해전! 칠천량해전(1) | 원균의 자업자득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지난 출정으로 적선 10척을 깨트렸으나 판옥선은 그보다 훨씬 많은 32척을 잃으면서 전임 통제사였던 이순신과는 180도 다른 성과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원균은 이제 와서 부산포 출정이 불가하다며 말을 번복했고, 이순신이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기 위해 만든 운주당에서 기생을 끼고 술을 퍼마시는 추태를 부렸습니다. 이에 화가 난 도원수 권율이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원균에게 곤장을 쳤습니다. 그러자 원균은 분을 못 이겨 전 함대를 이끌고 출정에 나섰습니다. * 도원수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치고 출정을 강요하여 조선 수군을 사지(死地)로 밀어 넣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곤장을 친 이유는 원균이 지난 장계에서 자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면 부산포를 공격하여 적을 섬.. 2022. 3. 8.
[임진왜란80] 도원수 권율에게 곤장을 맞는 원균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부산포 공격에 30만 육군이 필요하다는 장계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당연히 그 요청을 들어줄 순 없었고 대신 도원수 권율 휘하의 육군 5천여 명을 수군으로 배속시켜 주었습니다. 지난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인 시절에는 수군 진영의 병사들을 육군으로 배속시켰던 일이 있었으니 선조가 원균을 얼마나 총애했는지, 그리고 원균에 대한 기대감이 얼마나 컸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원균은 일부 병력을 지원받게 되었고, 계속되는 출전 압박에 부산포로 출정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1597년 6월 18일, 원균은 출정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적선 두 척을 불태웠을 뿐 연안에 늘어선 왜성에서의 포격과 일본 수군의 저항으로 보성군수 안흥국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습니다. 이를 당.. 2022.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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