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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카와 다카카게10

[임진왜란62] 행주대첩(3) 계속되는 공격과 예상치 못한 변수 | 일본군 6진 모리 히데모토의 공격 조선군은 일본군 1진부터 5진까지의 계속된 공격을 잘 방어하였으나 쉴 틈도 없이 6진의 모리 히데모토가 출진하였습니다. * 1진 : 고니시 유키나가, 2진 : 이시다 미츠나리, 3진 : 구로다 나가마사, 4진 : 우키타 히데이에, 5진 : 깃카와 히로이에 모리 히데모토의 일본군은 처영이 이끄는 승병과 육박전을 전개하였는데 조선군은 계속된 전투로 점점 지쳐가는 상태였습니다. 반면에, 단병접전에는 도가 튼 일본군이었으나 승병들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재 주머니를 얼굴에 뿌리자 앞을 볼 수가 없었고, 그사이에 목이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공격이 지지부진해져 갈수록 피해가 늘어가고, 더 치고 나가지도 못하자 후퇴를 명하였습니다. | 일본군 7진 고바야카와 다카카.. 2022. 1. 10.
[임진왜란58] 기세를 타고 한양으로! 벽제관 전투(1) 1593년 1월 9일, 3차례의 탈환 시도 끝에 평양성을 되찾은 조명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1월 10일에는 개성까지 진격합니다. 고구려의 수도에 이어 고려의 수도까지! 한편, 평양성을 지키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4차 평양성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안전한 철수를 보장하는 협상을 맺고도 조명연합군의 추격을 받았으나 황해도에 진출해있던 일본 제3군 선봉장인 구로다 나가마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한양으로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양성 전투의 소식을 듣게 된 한양의 일본군은 명나라 군대의 대규모 참전과 압도적인 화력에 겁을 먹고 남쪽으로 후퇴하자는 의견이 대다수였으나 일본 제6군 선봉장이자 전라도 진출 임무를 실패했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여기서 더 이상 물러난다면 적군의 기세는 더 높아질 것이고 아군의 기세.. 2022. 1. 2.
[임진왜란42] 만고의 충신인가 무리한 공격인가? 제2차 금산전투 8월 1일, 조헌의 의병, 청주 방어사 이옥과 공주 목사 허욱의 관군, 그리고 영규의 승병이 연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습니다. 청주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81 [임진왜란39] 의병, 관군, 승병의 연합작전! 청주성 전투 1592년 6월 3일, 일본 제3군 선봉장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에 의해 청주성이 함락되면서 청주 방어사 이옥은 도망쳤고, 청주성은 하치스카 이에마사라는 장수가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후 7월 historicalhistory.tistory.com | 모두가 반대해도 나는 갈 것이다! 이후 조헌은 기세를 몰아 원래의 목표였던 금산을 탈환하려 했고, 군사를 지원받기 위해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윤국형),.. 2021. 12. 2.
[임진왜란26] 영남 3대 의병장의 우척현 전투 | 일본 제6군의 전라도 공격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 제1군이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 제2군이 함경도로 진출할 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 제6군은 전라도 점령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는 곽재우의 의병에게 정암진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후 이치와 웅치 고개를 넘어서 전주성으로 향하려 했으나 이치는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끄는 조선군의 저항에 가로막혀 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웅치는 의병장 황박과 정담, 이복남의 관군이 뚫리긴 했으나 웅치에서 살아남은 조선군과 황진의 활약으로 안덕원에서 패배하면서 금산으로 퇴각했고, 거기다 고경명의 의병과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이 금산성을 공격하기까지 했으니 고바야카와의 군대는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전라도 공격.. 2021. 11. 10.
[임진왜란25] 이치 전투의 결과와 영향 이치 전투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승리로 기울어갈 때쯤 종횡무진 활약했던 동복현감 황진이 이마에 총탄을 맞아 후송되었고, 의병장 황박마저 전사하면서 조선군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선군 진영의 혼란을 틈타 일본군이 성채로 뛰어들어오니 그동안 잘싸웠던 조선군에게 위기가 닥쳐 전황은 다시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러자 전투를 총지휘하던 광주목사 권율이 직접 칼을 빼들고 뒤를 보이는 병사들을 베어버렸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병을 베면서 전투를 독려하니 조선군의 사기가 다시 올라가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전장에 위기가 닥쳤을 때 지휘관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1차로 5월의 정암진 전투, 2차로 7월에 벌어진 웅치 전투와 .. 2021. 11. 9.
[임진왜란23] 고경명의 의병과 곽영의 관군의 연합작전! 1차 금산 전투 마침내 7월 9일, 고경명은 정예 기병 수백 명을 앞세워 적진을 돌파하려 했는데 오히려 역습을 당해 후퇴하였습니다. 이에 고경명이 직접 북을 치며 싸움을 독려하자 군사들의 사기가 진작되어 일본군은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습니다. 후퇴한 일본군은 토성을 쌓아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였고, 이 모습을 본 고경명은 성밖의 관사를 불태운 뒤 포를 쏘니 성 내부까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그러자 일본군은 성문을 열고 나와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고경명의 의병이 사면에서 공격하자 큰 피해를 입고 감히 나오지 못했습니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고 곽영의 관군은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하지 않았으며 일본군이 구축한 토성은 견고해서 함락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고경명은 잠시 후퇴하였습니다. 이때 전라도 방어사 곽영은 고경명에게 .. 2021. 11. 7.
[임진왜란22] 금산성을 탈환하기 위해 모이는 관군과 의병 이번 시간에 다룰 내용은 6월 23일, 금산군수 권종이 전사하면서 함락된 금산성 전투가 아닌 고경명의 의병과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이 연합하여 금산성을 공격한 전투입니다. 7월 7일의 웅치 전투와 7월 9일의 안덕원 전투로 적지 않은 피해를 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 제6군은 목표였던 전주성 공격을 잠시 미루고 금산으로 후퇴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노리고 있던 대규모의 병력이 있었으니 바로 고경명이 이끄는 6천 7백의 의병이었습니다. | 고경명은 누구인가? 고경명은 임진왜란 직전(1590년)에 통정대부 겸 동래부사로 재직할 때 청렴했고, 백성들을 잘 다스렸으나 정철의 건저의 문제에 연루되면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상태였습니다. 만약 이때 고경명이 파직되지 않았다면 동래성 전투는 고경명이 지휘했을.. 2021. 11. 6.
[임진왜란21] 웅치의 조선군은 아직 죽지 않았다! 안덕원 전투 7월 7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 제6군은 웅치에서 의병장 황박과 오정달의 제 1방어선과 나주 판관 이복남의 제 2방어선, 그리고 김제 군수 정담의 최후방어선까지 혈전 끝에 무너뜨리면서 웅치를 기어코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전투에서 김제 군수 정담과 많은 군사들이 전사했으나 일본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고, 7월 9일에는 일본군이 그들의 목표였던 전주 부근으로 진출했습니다. 이에 맞서 조선군은 전라감사 이광의 지휘 아래 안덕원에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주성은 병사한 전주부윤 권수를 대신해 이정란이 지키게 했으며, 이광 본인은 남고산성(전주)을 최후방어선으로 삼아 지키고 있었습니다. * 남고산성은 고덕산 자락을 따라 쌓았기 때문에 고덕산성으로도 부르며,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수도인 완산주(전주).. 2021.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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