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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합군9

[임진왜란114] 노량해전(4)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 적의 퇴로를 막아라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 노량으로 들어선 시마즈 요시히로, 소오 요시토시,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일본 수군 500척은 미리 매복해있던 조명연합 수군에게 잔뜩 두들겨맞은 후 육지로 막힌 포구인 관음포를 바다로 착각하고 사지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고니시는 그 틈을 이용하여 여수 연안을 돌아 남해 방향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이후 시마즈를 위시한 일본 함대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명나라 수군을 공격하여 활로를 열려고 했습니다. 이에 명군 선봉에 있던 부총병 등자룡이 탄 판옥선을 일본 전선이 에워쌌고, 등자룡은 포위된 상태에서도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등자룡은 전사하고 판옥선은 불타버렸습니다. 곧이어 일본군은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판옥선에도 접근했으나 이순신의 조선 .. 2022. 9. 17.
[임진왜란111] 노량해전(1) 고니시의 뇌물 | 뇌물로 육군의 공격을 막자 1598년 9월 20일에서 10월 7일까지의 왜교성 전투로 조명연합군은 다수의 일본군과 전선을 격파했으나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으며, 왜교성과 고니시의 목을 얻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역시 성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큰 피해를 입었고, 성 일대의 육로와 수로가 포위된 채 고립된 상황은 여전했습니다. 이에 고니시는 안전한 철수를 보장받기 위해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에게 또다시 뇌물을 주었고, 유정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당장 명나라 육군의 공격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육로로 철수하기에는 유정의 서로군 외에도 중로군의 제독 동일원과 정기룡, 동로군의 제독 마귀와 김응서 등 수많은 조명연합군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뚫고 지나가기란.. 2022. 9. 7.
[임진왜란104] 1차 울산성전투(3) 최악의 상황에서 다가온 구원의 손길 | 가토를 구하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 12월 28일, 공성전을 시작한 지 6일째 되던 날, 조명연합군은 공세를 재개하였고, 울산성 외성을 재점령하였습니다. 가토는 또다시 내성으로 몰리며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고, 내성에서도 벼랑 끝까지 몰리자 가토는 부상병들까지 동원하여 맞섰으나 이마저도 여의치않자 할복을 준비하니 조명연합군은 이제야말로 승기를 굳히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방에서 가토를 구원하기 위한 지원군이 나타났고, 조명연합군은 성을 공격하는 병력을 줄이고 지원군을 상대하게 했지만, 지원군의 숫자는 계속 늘어 나베시마 나오시게,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비롯한 수많은 장수들과 그리고 가토와 철천지 원수이자 울산성과 거리도 가장 멀었던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까지 병력을 이끌고 오니 그 수가 수만.. 2022. 8. 13.
[임진왜란102] 1차 울산성전투(1) 두려움에 빠진 적을 교란하라! | 공격목표는 어디인가 육지에서의 직산 전투와 바다에서의 명량 대첩으로 북진이 좌절된 일본군은 더 이상의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고 귀국하려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반대로 철수할 수 없게 되자 남해안에 머물면서 왜성을 쌓고 조명연합군의 반격을 저지하려 하였습니다. 이때 조명연합군의 명나라 경리 양호와 도원수 권율은 여러 왜성 중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울산성(도산성)의 가토 기요마사로 공격목표를 압축했고, 둘 중 어느 곳을 공격할지 논의 중이었습니다. 조명연합군은 논의 끝에 다음과 같은 이유로 울산성의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기로 하였습니다. 첫째로, 울산은 일본군의 본진인 부산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울산성을 함락시킨다면 일본군의 사기를 한순간에 꺾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 2022. 8. 6.
[임진왜란89] 황석산성 전투(2) 백사림의 도주와 피로 물든 바위 | 백사림의 도주, 그리고 붕괴 조선군은 높고 험준한 곳을 따라 유리한 지형을 끼고 싸우고 있었지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이 몰려드는 일본군 정예병을 당해낼 수 없었고, 전황이 점점 조선군에 불리해지자 전임 김해부사 백사림은 자기 가족을 먼저 성 밖으로 빼낸 뒤 자신도 성문을 열고 도망쳤습니다. 그러자 일본군이 북문을 통해 벌떼같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가뜩이나 불리했던 상황에서 성문까지 열리자 황석산성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 성문을 연 백사림과 그 가족이 살아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성문을 열어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일본군과의 밀약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결국, 목숨을 걸고 싸우던 군민들은 쏟아지는 일본군을 보고 동요하여 가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 2022. 6. 22.
[임진왜란59] 과도한 자신감, 성급한 진격의 결과! 벽제관 전투(2) 1월 25일, *여석령에서 벌어진 조명연합군의 정탐병이 일본군의 정탐병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전공을 세울 욕심에 자신의 기병만 이끌고 *벽제관으로 진군하였습니다. * 여석령 : 숯돌고개라고도 하며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에 위치해 있다. * 벽제관 :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해있으며,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들어가기 하루 전 날 머물던 역관 그런데 벽제관은 비가 온 뒤라 땅이 진창이 되어 기병이 기동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고, 그 틈을 노려 매복해있던 일본군이 일제히 조총을 발사하였습니다. 마치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의 기마병이 늪지대에 빠진 것이 연상되는 장면입니다. 명군은 그제서야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아차렸으나 백병전에 강한 일본군 3개 부대에 포위된 후였고, 평양성에서 불랑기포를.. 2022. 1. 4.
[임진왜란56] 제4차 평양성 전투(2) 막다른 길에 몰린 일본군의 최후는? 맹렬한 화포 공격으로 평양성의 외성을 함락시킨 조명연합군은 물밀듯이 중성으로 치고들어갔고, 일본군은 계속 밀려나 풍월정에 토굴을 쌓아 올려 결사항전하였습니다. 조명연합군의 총지휘관이자 명나라 제독인 이여송은 이곳을 집중공격했지만 일본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막혀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여송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상을 했고, 고니시는 계속 방어하다간 죽거나 포로로 잡힐 것을 염려하여 협상에 응했습니다. 협상의 내용은 일본군이 평양성에서 물러나는 대신 조명연합군이 이들을 추격하지 않고 안전하게 보내줄 것을 보장하고 평양성의 포위를 풀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군은 협상의 소식을 듣고 격분했으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임진왜란의 일본 제1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고 싶었으나 지휘권이 명나라에.. 2021. 12. 28.
[임진왜란55] 조명연합군의 집중 포화! 제4차 평양성 전투(1) 임진왜란 초반, 물밀 듯이 진군해오는 일본군에 의해 의주까지 밀려난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에 명나라는 자국의 국경까지 위협을 받자 요동 부총병 조승훈을 원군으로 파병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원수 김명원과 요동 부총병 조승훈의 조명연합군은 평양성 탈환에 실패하였고, 조승훈은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요동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제2차 평양성 전투) 제2차 평양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4 [임진왜란32] 조명연합군의 첫 전투! 제2차 평양성 전투 |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 실패 육지에서는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가 전라도 점령에 실패했고, 바다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한산도에서, 구키.. 2021.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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