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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우수사 이억기9

[임진왜란82] 칠천량해전(2) 희망을 절망으로 바꾼 원균의 결단 | 아직은 희망이 있다, 그렇지만 원균 휘하에서는 절망뿐이었다. 지난 전투에서 보여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무능한 행보로 많은 군사와 함대를 잃은 조선 수군은 매우 위축되었고, 지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원균은 칠천량에 함대를 정박시키고는 인근에 척후선을 보내거나 경계병을 세우지도 않고 술에 찌들어있을 뿐이었습니다. * 칠천량 : 경남 거제시 하청면 실전리와 하청면 어온리 사이의 해협 그날 밤, 적선 2척이 아군 진영에 다가와 포를 쏘자 조선군 진영은 화들짝 놀라 혼란에 빠졌고, 제각기 도망치기에만 급급한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7월 16일 5경(새벽 3시~5시)에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포를 쏘아 한밤을 놀라게 했다. 우리 수군은 이미 어찌할 수 없이 매우 급하게 되어 배를 멈추니 날랜 .. 2022. 5. 29.
[임진왜란65] 조선 수군 최초의 상륙작전! 웅포해전(2) 2월 10일부터 시작된 조선 수군의 4차례의 웅포 공격으로 5척의 적선을 격침시키고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했으나 웅포에는 아직 훨씬 많은 수의 적선과 병력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순신이 기다리던 조선 육군의 지원이 어렵게 되니 조선 수군이 독자적으로 웅포의 왜성과 포구에서 바다로 나올 생각이 없는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2월 22일, 임진왜란 최초로 상륙작전을 전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선 수군이 보유하고 있던 성응지의 의병과 심혜, 의승이 이끄는 승병 1,700여 명을 동원하여 그중 1,100명을 남양리(안골포)에, 남은 600명을 제포(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각각 상륙시켰고, 경쾌선을 15척씩 조직하여 차례로 웅포로 진격한 후 공격하고 빠지길 반복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3.. 2022. 1. 17.
[임진왜란64] 나오지 않는 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웅포해전(1)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의 제4차 평양성 전투로 평양성이 탈환되자 일본군의 기세가 꺾였다고 판단한 조선 조정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다시 한번 부산을 공격하여 일본군이 바다로 달아날 길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이순신은 명을 받들어 2월 2일에 42척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2월 7일에는 *견내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 2월 8일에는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전선 40척과 합류하였습니다. * 견내량 :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사이의 좁은 해협 이렇게 다시 한번 연합함대를 구성한 조선 수군은 칠천도를 지나 부산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날씨가 좋지 않아 날이 풀리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씁니다. 2월 10일, 조선 수군은 부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웅포에 .. 2022. 1. 15.
[임진왜란44] 이제 남은 건 부산뿐이다! 적의 본진으로 진격하는 조선수군 1592년 8월, 일본군은 수도 한양에 주둔 중인 부대와 북상해있던 부대 일부가 김해와 부산, 이렇게 경상도 지방으로 남하하였습니다. 이를 알게 된 경상도 순찰사 김수는 조선 조정에 "위로 침범한 적도들이 낮에는 숨고 밤에 행군하여 양산, 김해강 등지로 잇달아 내려오는데, 짐짝을 가득 실은 것으로 보아 도망치는 낌새가 현저합니다" 라는 장계를 올렸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적의 본진인 부산 공격을 요청하였습니다. 사실 일본군 부대가 남하한 이유는 전라도 공격에 애를 먹고 있던 일본 제6군(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부대)을 지원하는 한편,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진입하는 통로인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동안 일본군이 전라도 진출에 여러 번 고배를 마셨지만 그래도 전라도는 조선이나 일.. 2021. 12. 5.
[임진왜란30] 우수한 무기와 탁월한 전략! 안골포 해전 7월 8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73척의 함대를 물리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한산도 대첩) * 73척 중 47척 격침, 12척 나포, 14척은 퇴각 이는 지금까지 치렀던 해전보다 훨씬 더 큰 전과를 이룬 해전이었기에 장수와 병사들 모두 매우 기뻐했고, 승세를 타고 가덕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날이 저물고 역풍도 크게 불어서 인근에 정박해 있었는데 승리의 여운이 채 지나기도 전에 *안골포에 적선이 있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 안골포 : 안쪽이 깊은 산골처럼 보인다는 뜻에서 안골포라 불리게 되었으며, 현재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청안동 이제 부산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일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와키자카 야스하루.. 2021. 11. 17.
[임진왜란28] 한산도 대첩!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다! 한산도에 펼쳐진 학의 날개 https://youtu.be/htWDDIt-qD8 | 한산도 대첩 7월 8일, 조선 수군은 5~6척의 판옥선이 *견내량으로 진격하여 정박해있던 일본 수군을 향해 화포를 발사했습니다. * 견내량 :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경남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사이의 해협 소수의 전선으로 피해를 줌으로써 일본군을 자극하기엔 충분했고, 전공을 세울 욕심에 들떠있던 와키자카는 큰 의심 없이 미끼를 물어 조선 수군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함대는 첨저선이었으므로 평저선인 조선의 판옥선에 비해 속도가 매우 빨랐기 때문에 퇴각하는 판옥선에 빈틈을 주지 않고 따라붙은 후 조총을 쏘며 싸움을 걸었습니다. * 첨저선은 선체의 바닥이 뾰족한 선박으로 저항을 적게 받아 속력이 빠르나 선회하기 어렵고, 화.. 2021. 11. 13.
[임진왜란27] 제해권을 장악하라! 이순신의 3차 출정 | 진군에 제동이 걸린 일본군 1592년 6월,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가 전라도를 공격하면서 이치, 웅치, 안덕원 등지에서 치열한 혈전이 펼쳐질 무렵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지휘하고 있는 남쪽 바다에서도 전란의 흐름을 바꿀 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그동안 옥포에서의 승리를 시작으로 합포ㆍ적진포ㆍ사천ㆍ당포ㆍ당항포ㆍ율포에서 적선을 일방적으로 격침시키며 남해의 제해권을 넓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일본 수군은 서해로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안도로 진군해있는 일본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제때 보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명나라 군대가 참전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조선의 최후방어선이자 선조가 있는 의주를 목전에 두고도 더는 진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조선 수군의.. 2021. 11. 12.
[임진왜란 16] 율포해전과 제해권을 넓혀 나가는 조선 수군 6월 5일~6월 6일까지 조선 수군은 당항포에서 일본 수군을 맞아 26척을 격침시키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6일에는 비가 내려 시야를 관측하기 힘들었으므로 당포(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날 저녁, 조선 수군은 마루장(경남 고성군 동해면)으로 이동했고, 다음 날 아침(7일) 척후선(정찰선)을 보내 인근의 적선을 수색한 결과, 영등포에 있던 척후선이 율포(경남 거제시 장목면 율촌리)에서 부산으로 이동 중인 적 대선 5척, 중선 2척을 발견했다고 전했습니다. 6월 7일 정오쯤, 조선 수군은 영등포를 거쳐 역풍을 딛고 율포 앞바다까지 추격하자, 당황한 일본 수군은 싸울 의지를 잃고 그간 노획했던 물건들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리고 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 일본 수군의 입장에서 조.. 2021.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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