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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 통제영2

[임진왜란101] 일본군의 기습을 역기습으로 대처한다! 절이도해전 1598년 7월 16일,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과 그 휘하의 5천 군사가 고금도에서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합류하였고, 7월 18일, 도도 다카토라와 가토 요시아키는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고금도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수군의 움직임은 사방에 깔린 탐망선에 의해 곧바로 이순신에게 보고되었고, 조선 수군은 적선이 당도하기 전에 고금도와 거금도 사이에 위치한 금당도로 진격하였습니다. 이때 일본 수군이 고금도로 올 수 있는 경로는 소록도와 거금도 사이의 길목을 통과하는 방법, 그리고 거금도와 금당도 사이의 길목을 통과하는 2가지 길이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함대를 이 2곳에 나누어 배치해 일본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7월 19일 새벽, 도도 다카토라의 일본 함대가 거금도와 소록도 사이의 .. 2022. 8. 3.
[임진왜란100] 조선 수군의 새로운 전진기지 고금도, 그리고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합 | 새로운 진영 고금도, 그리고 해로통행첩 명량대첩의 승리 이후 고군산도까지 진영을 옮겼던 조선 수군은 1598년 2월 17일, 다시 남해 바다로 내려와 고금도(전남 완도군 고군면에 있는 섬)에 진영을 세웠습니다. 기적 같은 승리 소식을 듣고 흩어졌던 군사들과 함선이 다시 모여들었고, 이순신이 계속해서 수군 재건에 박차를 가한 결과 상당수의 군수품을 확보한 데 이어 80여 척에 달하는 판옥선을 보유함으로써 명량에서 승리했음에도 전투를 지속할 여력이 부족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적의 침입에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었고, 임진년 때의 한산도처럼 이제는 고금도가 전진기지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때 이순신은 배를 이용하는 자에게 곡식 1~3섬을 받고 해로통행첩을 발행하여 바.. 2022.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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