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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왕자 장보고! 청해진과 더불어 해상강국으로 급부상하는 신라

by 역사채우기 2021.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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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발해의 전성기에 대한 글을 쓸 때 당시 신라에서는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남북국시대의 진정한 전성기를 이룩했다는 구절을 쓴 적이 있습니다.

같은 시기 신라에서는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무역을 주도하고 있었으니 남북국시대의 진정한 전성기라 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5 [역사채우기]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신라의 마지막 불꽃이라 할 수 있는 장보고청해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합니다.

 

https://youtu.be/2ZDa9Zgz40s

 

청해진은 828년, 남북국시대 때 신라의 장군이었던 장보고의 요청으로 무주 침명현(지금의 전남 완도군)에 설치한 진영입니다.
장보고는 일찍이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 벼슬길에 오른 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서주(지금의 중국 강소성 쉬저우시)의 무령군중소장까지 지냈으나 이내 신라로 돌아옵니다.

청해진 위치(B)(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그 이유는 장보고가 당나라에 머무는 동안 당나라의 해적들이 신라의 백성들을 잡아가 노비로 팔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신라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신라는 혜공왕(신라의 36대 왕)이 피살되면서 하대 신라로 접어들었고, 계속되는 내분왕위쟁탈전으로 국방력이 약화되었던 시점이라 당나라 해적의 침입에 취약했으며, 신라 무역 상인들의 안전 역시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신라에 도착한 장보고는 당시 왕이었던 흥덕왕(신라의 42대 왕)에게 실상을 보고하였고, 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해상 기지 건설의 중요성을 피력하였습니다.

 

 


| 청해진 설치

그러자 흥덕왕장보고의 요청을 받아들여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였습니다.
이후 장보고청해진을 기점으로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해적 소탕에 주력하면서 해적은 차츰 줄어들었고, 민생 안정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장보고의 해상활동 민족기록화


게다가 이를 통해 청해진이 신라의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지리적 이점을 살려 일본당나라, 대식국(페르시아와 아라비아)의 상인이 드나드는 국제무역항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당나라 등주에는 신라방(당나라의 신라인 집단 거주지)이 있었는데 이를 활용하여 등주 적산촌에 법화원을 건설하여 청해진의 당나라 지사 역할을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법화원 사진

* 등주 : 발해 2대 왕인 무왕이 공격했던 곳으로 산둥반도에 있음


이렇게 장보고는 신라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그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했는지 다음의 글을 통해 대략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인 두보는 장보고를 '명철한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 동방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칭했으며, [번천문집]에 장보고 편을 따로 만들 정도로 장보고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또한, 일본의 승려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당나라를 여행했을 때 장보고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돌아갔던 일을 떠올리며 “평소에 받들어 모시지 못했으나, 오랫동안 고결한 풍모를 들었습니다. 엎드려 우러러 흠모함이 더해갑니다.”라는 편지를 남겼습니다.

 


| 다시 시작된 왕위쟁탈전

장보고가 이처럼 군사력경제력까지 키우자 중앙 정부의 정치적 분쟁에도 손을 뻗게 되었습니다.


836년에 청해진 설치를 허락하며 혼란기 속 잠깐이나마 안정을 이룩한 흥덕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다시 왕위쟁탈전이 벌어졌고,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한 김제융이 희강왕(신라의 43대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위쟁탈전 속에서 죽은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청해진으로 도망가서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합니다.
청해진의 입지를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신무왕(드라마 해신 중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희강왕은 왕위 다툼 속에서 피살 또는 자살하면서 민애왕이 신라의 44대 왕으로 즉위합니다.
이때 청해진에서 세력을 키우던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자신이 왕이 되면 장보고의 딸을 태자비로 맞이할테니 청해진 군사 5천 명을 자신에게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의로움을 보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용기없는 자라 하였으니, 내 비록 용렬하나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장보고는 요청에 적극 호응했고, 김우징과 청해진 군사들은 대구에서 신라의 중앙군 10만을 무찌르며 파죽지세로 진군한 뒤(달벌대전) 서라벌(신라의 수도이자 지금의 경주)까지 함락시킵니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의 모습(드라마 대왕의 꿈 중에서)



그렇게 서라벌에 입성한 김우징은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신라의 45대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그리고 장보고는 공을 인정받아 감의군사라는 칭호와 식읍 2,000호를 받았으나 신무왕은 6개월만에 등창으로 죽고 그의 아들이 문성왕(신라의 46대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 지켜지지 않는 약속

문성왕 역시 장보고의 도움 덕분에 왕이 된 것이었기 때문에 장보고에게 진해장군 칭호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중앙 귀족들은 나날이 커지는 장보고의 세력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때, 문성왕의 아버지였던 신무왕이 이전에 장보고와 약속했던 장보고의 딸을 문성왕의 비로 삼는 일이 거론되었습니다.
신무왕이 즉위하고 약속을 이행하기도 전에 죽으면서 미뤄졌던 일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었습니다. 
예전에 김우징은 자기가 왕이 되면 장보고의 딸태자비로 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해진에서 세력을 키우던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자신이 왕이 되면 장보고의 딸을 태자비로 맞이할테니 청해진 군사 5천 명을 자신에게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때 문성왕은 이미 왕비가 있었기 때문에 장보고의 딸을 두번째 왕비로 맞으려했으나 중앙 귀족들이 섬사람의 딸을 왕비로 들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 장보고와 청해진의 최후

장보고는 이 일을 매우 불쾌히여겼고, 귀족들은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들이는 것에 대해 반대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장보고가 무슨 일을 벌이지 않을까 불안해했습니다.
이때 장보고의 옛 부하였던 염장이 장보고를 제거하겠다며 나섰습니다.

염장(드라마 해신 중에서)


염장은 장보고에게 투항하는 척하며 청해진으로 가서 함께 술을 마시다가 한밤중에 장보고가 술에 취한 틈을 타 찔러 죽였습니다.
이렇게 기울어가던 신라를 해상왕국으로 발돋움하게 한 장보고는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때가 언제였는지 우리나라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846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일본의 역사서인 [속일본후기]에는 841년 11월로 기록하고 있어 장보고가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장보고가 죽은 후 청해진은 리더의 갑작스런 부재로 교역활동이 마비되면서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때 장보고의 부장인 이창진은 반란을 일으키려했으나 염장에 의해 토벌되면서 장보고 부하들 중 일부는 당나라 또는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렇게 청해진은 염장의 손에 들어갔으나 851년, 문성왕청해진에 토벌군을 보내면서 혁파되었으며, 그 곳에 살던 주민들은 섬에서 내륙 지역인 벽골군(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으로 강제 이주 되었습니다.

현재의 청해진(출처 : ko.wikipedia.org)

 

다음 시간부터는 임진왜란에 대해 시리즈로 이어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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