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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67]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2)

by 역사채우기 2022.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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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 교섭으로 휴전 기간이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압적인 명령으로 일본군은 6월 15일에 함안, 16일에 반성, 18일에는 의령까지 점령하면서 점차 진주성 쪽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 군대의 규모만 해도 9만 3천에 이르렀으며, 이는 이순신과 대치 중인 일본 수군과 부산 등의 전략적 거점을 수비할 일부 일본군을 제외한 모든 전력을 진주성에 쏟아부으려는 계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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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으로 진군하는 일본군(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이들을 이끄는 지휘관은 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 3군 선봉장 구로다 나가마사, 4군 선봉장 모리 요시나리의 휘하 시마즈 요시히로, 6군 선봉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7군 선봉장 모리 데루모토를 대신한 모리 히데모토, 8군 선봉장이자 일본군의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대장 격 인물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 독안룡이라 불리던 다테 마사무네 등이 있었으니 몇 달 전 행주대첩 때보다도 훨씬 막강한 전력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행주대첩에서의 일본군 지휘관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02?category=928692

 

[임진왜란60] 행주대첩(1) 조그만 산성으로 몰려드는 초호화군단

1592년 12월,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경기도 오산의 독산성에서 승리한 후 북상을 지속했고, 1593년 1월에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기세를 이어 한양을 되찾기 위해 남하하였습니다. 독

historicalhistory.tistory.com

 


한편, 진주성에는 진주목사 김시민의 후임으로 서예원이 있었으며, 병력은 2천 4백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진주성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명군 제독 이여송은 눈치만 살폈고, 다른 명나라 장수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명군 제독 이여송(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게다가 도원수로 승진한 권율도 진주성에 입성하지 않았고, 전라병사 선거이와 영천 군수 홍계남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나 안쪽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라고 말하며 역시 진주성 입성을 포기하였습니다.

도원수 권율

 


그리고 홍의장군 곽재우

 

"3리밖에 안되는 성으로 적병의 성대한 세력을 막을 수 없으며, 자신이 죽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전투 경험이 많은 군졸을 버릴 수 없으니 밖에서 원조할지언정 성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진주성 입성 명령을 거절하였습니다.

홍의장군 곽재우



그러나 이처럼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진주대첩의 영향으로 피난민들은 진주성에 들어가면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진주성에 앞다투어 몰려들었습니다.


이렇게 막아야 할 적은 많고 지켜야 할 백성은 많은데 이들을 지킬 군사가 없는 이때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있었으니...

당시 명성이 있던 장수들이 진주성 입성을 포기하는 가운데 창의사 김천일

 

"호남은 나라의 근본이고 진주는 실로 호남의 울타리다"

 

라고 말하며 3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하였고, 웅치와 이치 전투에서 활약한 충청병사 황진이 5백 명을,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3백 명을,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가 7백 명을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했으며, 이밖에도 사천현감 장윤, 김해부사 이종인 등이 진주성에 입성하니 관군과 의병을 합하여 6천의 군사를 모았으나 9만이 넘는 일본군을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아래는 충청병사 황진이 진주성에 입성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곽재우와의 대화 장면입니다.

당초에 황진진주로 나아가려 할 때 의병장 곽재우가 만류하며 말하기를 "진주는 외로운 성이니 지켜낼 수가 없다. 그리고 공은 충청도 절도사를 맡고 있는 만큼, 진주를 지키다 죽는 것은 직분에 걸맞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황진이 말하기를 "이미 창의사(김천일)에게 승낙하였으니,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식언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곽재우가 공의 뜻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술잔을 나누며 작별하였는데 뒤에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애통해하며 슬퍼해 마지않았다.

아! 공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정말 열장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충청병사 황진

 

 

앞서 고니시 일본군이 진주성을 잠깐 점령한 후에 더 진군하지 않고 물러날 것이니 성을 비워둔다면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 말한 바 있으나 진주성에 입성한 관군과 의병들은 일본군을 피해 들어온 피난민을 지켜야 할 명분이 있었고, 우리 땅을 적에게 그냥 내어줄 수도 없으며, 김천일이 말한 것처럼 진주성이 뚫리면 호남이 위험에 처하게 되니 9만이 넘는 적들이 오는 것과 자신들이 처할 운명을 알면서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결의를 다졌던 것입니다.

그렇게 6월 21일, 일본군이 진주성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진주성




다음 시간에 제2차 진주성 전투에 대해 이어서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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