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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파직2

[임진왜란77] 이순신의 2번째 백의종군과 정탁의 신구차 | 신임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2월 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파직되었고, 이 무렵 이순신은 조정의 명을 받아 부산포 앞바다로 출정하여 적을 공격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이 왜적을 토벌하고 통제영인 한산도로 돌아온 이후 2월 26일, 조정에서 보낸 파발이 한산도에 도착하여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한양으로 압송해갔으며, 후임으로는 전라병사 원균이 임명되었습니다. 이순신이 파직된 것은 아쉬운 일이나 이때 후임으로 원균이 아닌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임명되었다면 적어도 훗날의 기막힌 참변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다루었던 요시라의 반간계로 조선 조정과 경상우병사 김응서, 도원수 권율은 미끼를 덥석 물었고, 선조는 일본군이 또다시 바다를 건너 상륙한 것을 이순신의 책임으로 돌렸습니다. 그.. 2022. 2. 16.
[임진왜란76] 강화 회담의 결렬과 이순신의 파직 1592년에 발발했던 임진왜란은 벌써 여러 해를 넘겨 1597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는 계속 진행 중이었고, 그러는 동안 일본군은 남해안 연안 곳곳에 왜성을 쌓아 혹시라도 진군해올지 모르는 조선 수군을 방비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은 지난 임진년 때처럼 여러 차례 일본군을 공격하러 나서기 어려웠고, 일본군 역시 조선 수군과 싸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은 서로 대치한 채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 강화 회담의 결렬 그러던 중 명나라 경락 송응창은 강화의 조건으로 크게 3가지를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일본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 두 번째는 국경인이 넘겨준 조선의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송환할 것 세 번째는 전.. 2022.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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