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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77] 이순신의 2번째 백의종군과 정탁의 신구차

by 역사채우기 2022.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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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임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2월 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파직되었고, 이 무렵 이순신은 조정의 명을 받아 부산포 앞바다로 출정하여 적을 공격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이 왜적을 토벌하고 통제영인 한산도로 돌아온 이후 2월 26일, 조정에서 보낸 파발이 한산도에 도착하여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한양으로 압송해갔으며, 후임으로는 전라병사 원균이 임명되었습니다.

원균



이순신이 파직된 것은 아쉬운 일이나 이때 후임으로 원균이 아닌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임명되었다면 적어도 훗날의 기막힌 참변은 없었을 것입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그리고 지난 시간에 다루었던 요시라의 반간계로 조선 조정과 경상우병사 김응서, 도원수 권율은 미끼를 덥석 물었고, 선조는 일본군이 또다시 바다를 건너 상륙한 것을 이순신의 책임으로 돌렸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당장이라도 죽이려 하였습니다.


 


| 정탁의 신구차

그러자 우의정 정탁이 앞장서서 이순신을 살릴 것을 적극 요청하며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그 상소문의 이름은 *신구차로 전해지며 아래 내용은 신구차의 일부입니다.

* 신구차 : 죄가 없음을 밝혀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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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의 신구차(출처 : 전쟁기념관)

 

 

이모(이순신)는 참으로 장수의 재질이 있으며, 수륙전에도 못하는 일이 없으므로 이런 인물은 과연 쉽게 얻지 못할 뿐더러, 이는 변방 백성들의 촉망하는 바요, 왜적들이 무서워하고 있는데, 죄명이 엄중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용서해 줄 수가 없다 하고, 공로와 죄를 비겨볼 것도 묻지 않고, 또 능력이 있고 없음도 생각지 않고 끝내 큰 벌을 내린다면 공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내키지 않을 것이요, 능력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저 감정을 품은 원균 같은 사람까지도 편안하지 못할 것이며, 안팎의 인심이 이로 말미암아 해이해질까 봐 그게 걱정스럽고 위태한 일이며, 부질없이 적들만 다행스럽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은혜로운 하명으로써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있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갚으려는 마음이 반드시 저 명실 장군만 못지 않을 것입니다.

- 정탁의 상소문 [신구차]의 일부

 

 


| 이순신의 두 번째 백의종군

당시의 분위기를 볼 때 조정 내에서도 선조의 눈치를 보느라 이순신을 변호하기를 두려워했고, 오랜 친구이자 이순신을 천거했던 영의정 류성룡조차도 이순신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영의정 류성룡



그럼에도 우의정 정탁을 비롯하여 이순신의 기질을 알던 도원수 권율, 전 도원수 김명원, 연안성 전투에서 황해도를 지켜낸 이정암의 동생인 이조참판 이정형과 같은 인물들이 이순신을 변호하면서 선조는 죽을 위기에 빠져있던 이순신에게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에 임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우의정 정탁(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 이순신은 이전에 조산보 만호 시절, 북병사 이일의 군사 지원 거부로 녹둔도에서 다수의 적을 맞아 처절하게 싸워 끌려가던 백성 일부를 구출하고, 둔전을 끝끝내 지켜냈으나 군민 100여 명이 끌려가면서 백의종군을 했으나 이듬해 시전부락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서 복권되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던 중 이순신의 어머니는 이순신이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아들을 만나기 위해 여수에서 아산까지 노구를 이끌고 머나먼 뱃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의 어머니는 이순신을 만나보기도 전에 배 위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고, 이순신이 그 당시 얼마나 슬퍼했는지 [난중일기]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4월 13일,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4월 16일, 배를 끌어 중방포(충남 아산시) 앞에 옮겨 대어,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리고 나니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떠날 길이 또한 급해서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中에서

 

 

 

다음 시간에는 기문포 해전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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