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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3대 대첩2

[임진왜란53] 진주대첩(3) 일본군을 물리친 모쿠소 호간 10월 9일, 10월 6일부터 시작된 진주성 공방전은 며칠간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우키타 히데이에의 일본군은 진주성 외곽에 있는 의병이 배후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진주성 함락에 매번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병력의 우세함을 앞세워 부대를 나누어서 의병을 향한 공격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전력을 집중시키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진주성 외곽의 의병들은 의병장 김준민 등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군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습니다. 이에 의병과 진주성의 군사들은 성을 지켜낼 수 있다는 희망에 사기가 한껏 올라갔습니다. 한편, 일본군은 전략이 먹혀들지 않자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방패를 앞세워 피해를 최소화한 후 그 뒤에서 조총병이 사격하는 동안 보병들이 접근하는 전략을 썼으나 이 역시 진주.. 2021. 12. 20.
[임진왜란29] 급변하는 전황! 한산도 대첩의 결과와 평가 | 한산도 대첩의 결과 한산도 대첩으로 조선 수군은 부산을 제외한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확보하였으며, 이 시기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 제6군의 전라도 진출마저 좌절되면서 수륙 양면에서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원천봉쇄하였습니다. * 웅치, 이치, 안덕원, 금산 전투를 치르면서 일본 제6군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곡창지대였던 호남 지방이 보존되면서 전라도가 병참기지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계획했던 수륙병진 작전이 완전히 물거품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을 만나기만 하면 패배하는 일본 수군을 보고 "더는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고 해안에 성을 쌓아 방어에 주력하라" 라는 해전 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했으니 당시 일본.. 2021.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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