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29] 급변하는 전황! 한산도 대첩의 결과와 평가

by 역사채우기 2021. 11. 14.
반응형

| 한산도 대첩의 결과

한산도 대첩으로 조선 수군은 부산을 제외한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확보하였으며, 이 시기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 제6군의 전라도 진출마저 좌절되면서 수륙 양면에서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원천봉쇄하였습니다.

 

* 웅치, 이치, 안덕원, 금산 전투를 치르면서 일본 제6군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제6군이 이끄는 고바야카와 군과 조선 관군ㆍ의병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진 곳(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이는 곡창지대였던 호남 지방이 보존되면서 전라도가 병참기지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계획했던 수륙병진 작전이 완전히 물거품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을 만나기만 하면 패배하는 일본 수군을 보고 

 

"더는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고 해안에 성을 쌓아 방어에 주력하라"

 

라는 해전 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했으니 당시 일본에서 이순신 장군이 차지한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 이순신과는 싸워봤자 손실만 있을 뿐이니 안 싸우는 게 이득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 한산도 대첩에 대한 평가

이로써 전황은 조선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국난 극복의 원동력이 되었고, 한산도 대첩*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3대 대첩으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 임진왜란의 3대 대첩 : 한산도 대첩,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1차 진주성 전투)
* 대한민국의 3대 대첩 :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고수전쟁), 강감찬의 귀주대첩(거란의 2차 침입), 한산도 대첩

* 한산도 대첩이 살수대첩(30만)과 귀주대첩(10만)에 비해 상대한 적의 규모는 적지만 그동안 조선 측에 불리했던 전황을 뒤바꿔 국면의 전환점으로 이끌었다는 점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의 3대 대첩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반응형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는 한산도 대첩의 의의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평양에 당도했을 때 우리 진영에 이런 글을 보내왔다.
"우리 수군 10만 명이 곧 서해로 도착할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원래 적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해 서쪽을 공략하려 하였던 것이다. (수륙병진작전)
그런데 거제 싸움(한산도 대첩)에서 패하면서 한 팔이 꺾였기 때문에 비록 고니시 유키나가평양성을 점령하였을지라도 군세가 외로워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전라도충청도, 황해도평안도 연안까지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기에 군량을 조달하고 명령을 전달하여 중흥을 이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요동천진(현재 중국의 톈진시) 등지에 왜적의 손길이 닿지 않아 명나라 군사들이 육로로 와서 구원하여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모두 이 싸움의 공이다.

한산도 대첩 민족기록화

 

 

그리고 300여 년 후 대한제국 시기 미국인 고문이었던 헐버트한산도 대첩에 대해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에 사형 선고를 낸 전투"

 

라고 극찬했습니다.

* 살라미스 해전 : 기원전 480년에 살라미스 섬에서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이 페르시아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

 

 



다음 시간에는 안골포 해전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