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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백제의 역사

백제의 마지막 희망 복신

by 역사채우기 2021.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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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PZgK6G9LVQ

 

이번 시간에는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했던 복신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 백제의 멸망

660년, 신라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5만 군사와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군사가 연합하여 백제를 침략하였습니다.

 

백제는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 김유신의 군대에 맞서 4차례나 막아내었으나 관창반굴의 희생으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을 막지 못하고 전멸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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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전투 민족기록화(출처 : 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

 

 

게다가 웅진강(현재 금강) 지역에서 백제군이 당나라의 수륙군에게 돌파당하면서 상륙을 허용했습니다.

 

그러자 의자왕은 수도인 사비성보다 방어에 유리한 웅진성으로 피난을 갔는데 웅진의 방령이었던 예식진이 배신하여 의자왕을 사로잡아 소정방에게 바치면서 백제는 저항의 구심점을 잃게 되었고, 700년의 역사를 뒤로 한 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식진 묘비명

 


백제 멸망 후,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 대신, 백성 등 약 1만 2천 명을 당나라로 압송하였고, 웅진성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점령 지역에 대한 지배 의도를 노골적으로 표출하였으며,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에는 유인원과 1만 군사만을 남겨두고 모두 철수하였습니다.

소정방(드라마 대왕의 꿈 중에서)

 

 

 

| 백제부흥운동

이에 남은 백제 유민들은 당나라의 전력이 철수한 점을 기회로 삼고, 폭압적 통치에 저항하여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중 복신은 사비성이 함락된 직후 임존성을 중심으로 군을 일으켜 나당연합군에 저항하였고, 당나라군의 공격과 두량윤성을 공격하는 신라군을 격퇴하여 백제 부흥군의 기세를 드높였습니다.

 "오직 복신만이 신기하고 용감한 꾀를 내어 이미 망한 나라를 부흥시켰다."
- [일본서기]

귀실복신(출처 : KBS 역사스페셜)

 

 

또한, 복신은 백제 부흥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구심점을 모으기 위해 왜국에 사신을 보내 의자왕의 아들인 왕자 부여풍의 귀국과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각지에 있던 백제 부흥군과 흑치상지, 사타상여와 같은 걸출한 인물들 또한 군을 일으켜 복신과 연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당연합군의 공격이 닿지 않았던 곳에서 200여 개의 성이 호응하는 등 백제부흥세력이 날이 갈수록 규모가 커지자, 당나라는 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검교대방주자사로 임명하여 지원군을 보냈습니다.

 

이때 복신은 유인궤에게 사신을 보내

 

“대당이 대신라와 서약하여, 노소(老少) 가리지 않고 다 죽이고 영토를 신라에 넘겨주기로 했다는데, 가만히 앉아 병드는 것은 싸우다 죽느니만 못하기에, 굳게 지키고 있다”

 

라고 말하면서 사비성에 주둔한 당군에 대한 포위전을 펼쳤습니다.

 

 

거기다 복신의 동료 장수 도침은 사비성에 있는 유인원에게

 

"대사께서는 언제쯤 서쪽으로 돌아가시렵니까?


마땅히 사람을 시켜 전별해 드리리다"라고 조롱하는 글을 보낼 정도로 백제 부흥군의 위세는 커져갔습니다.

 

 

 

| 복신과 부여풍의 갈등

661년 6월, 왜의 덴지 천황사이노무라치 아치마사하타노 미야쓰코 에치노 다쿠쓰의 5천 병사와 부여풍을 백제 부흥군에게 보냈고, 복신부여풍을 왕으로 옹립한 후 도침을 죽여 막강한 지위를 차지하는 듯했습니다.

부여풍(드라마 대왕의 꿈 중에서)

 


하지만 복신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영향력이 점점 줄어든 부여풍은 제사만 주관하게 되었고, 나당연합군은 661년 9월에 옹산성을 함락시켰고, 662년 7월에는 진현성을 함락시켜 포위된 사비성에 대한 군량 수송로를 뚫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렇게 나당연합군의 압박과 더불어 피성 천도 문제 등으로 인해 복신과 부여풍의 갈등의 골은 깊어져 갔습니다.

 

<구당서>에 따르면 복신과 부여풍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자 복신이 부여풍을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병이 든 척했고, 부여풍이 문병하러 오면 죽이려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왕 풍장(부여풍)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그런 뒤에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여러 신하에게 "복신의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는 것이 좋겠는가, 아닌가?"라고 물으니 달솔 덕집득이 '이 악한 반역 죄인을 풀어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복신이 덕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시종하는 병사들에게 목을 베어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복신의 사망과 백제부흥운동의 종결

이렇게 백제의 마지막 희망인 복신은 663년 7월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직 부여풍에게는 663년 3월에 전장군 카미츠케노노키미 와카코가 이끌고 온 2만 7천의 왜군이 있었으나 이 일(복신의 처형)로 인해 백제 부흥군의 상호 신뢰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백제부흥군의 내분을 틈타 신라군과 당군도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신이 죽고 두 달 후인 663년 9월, 백제 부흥군과 왜군은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궤멸당했고, 살아남은 부여풍은 배를 타고 동맹국인 고구려로 달아났습니다.

백강 전투 상황도(출처 : commons.wikimedia.org)

 

 

이어 백제부흥군 제2의 거점이었던 주류성이 나당연합군에 함락되면서, 대부분의 성들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본거지였던 임존성은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백제부흥군을 이끌던 흑치상지사타상여가 변절하여 당나라에 항복한 후 백제부흥군의 손으로 임존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임존성에는 지수신이 남아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지수신은 처자식을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습니다.

 

이렇게 4년에 걸쳐 활발하게 진행되던 백제부흥운동은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고구려의 멸망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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