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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백제의 역사

고구려와 백제를 세운 여걸 중의 여걸, 소서노

by 역사채우기 2021.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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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2dqSwaguo

 

 

이번 시간에는 삼국시대의 두 축인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하는데 큰 역할을 한 소서노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소서노는 기원전 66년, 졸본부여의 5부족 가운데 하나인 계루부의 공주 또는 지역의 유력자인 연타발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성장하여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온조 두 아들을 낳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인 우태가 일찍 죽어 과부가 되었지만, 아버지와 남편에게 넉넉한 유산을 받고 든든한 지역적 기반을 갖고 있던 소서노는 큰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 주몽과 힘을 합하여 고구려를 세우다

그러던 때에 소서노동부여에서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쫓겨 졸본으로 들어온 주몽을 만났고, 두 세력이 힘을 합치자 백발백중의 활 솜씨를 자랑할 정도로 무예가 뛰어난 주몽과 소서노의 자본이 합쳐져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습니다.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주몽)의 석상(출처 : commons.wikimedia.org)

 


마침내 기원전 37년 2월, 졸본 남쪽에 도읍을 정하여 고구려를 건국하기에 이르렀고, 소서노는 주몽과 혼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소서노는 고구려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습니다.

주몽과 혼인한 후 왕비가 된 소서노(드라마 주몽 중에서)

 


소서노와 주몽의 시너지는 고구려 건국 이후에도 지속되어 고구려는 말갈을 물리치고 불류국, 행인국을 복속하는 등 나라를 안정적으로 성장시켰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은 소서노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와 온조를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라고 당시 상황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구려는 발전하고, 둘은 행복하게 지냈으나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치기 전에 혼인했던 예씨 부인의 아들 유리(후일 고구려의 2대 왕이 됨)가 주몽에게 찾아오면서 문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유리왕(드라마 바람의 나라 중에서)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았고, 소서노의 맏아들이었던 비류가 왕위를 이으리라 생각했던 소서노는 큰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 아들과 함께 백제를 세우다!

소서노는 이 상황에서 유리와 권력 다툼을 벌이는 대신, 자신을 따르는 세력과 비류, 온조와 함께 새로운 땅으로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 오셨을 때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떠나신 이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갔으니, 우리가 여기에서 혹처럼 남아 있는 것은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선택해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라고 비류가 온조에게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서노는 자신을 따르는 세력과 함께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이르자 바닷가에 살고 싶어 하는 비류에게 열 명의 신하가 말리며 말했습니다.

“이 하남 땅은 북쪽으로 한강이 띠를 둘렀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따랐으며, 남쪽은 비옥한 들판이 바라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가로막혔으니, 이런 자연적인 요새와 지리는 얻기 어려운 지세입니다.
도읍을 여기에 세우는 것이 어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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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유역 사진(드라마 근초고왕 중에서)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지금의 인천광역시)로 갔지만, 땅에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생활하는 데 불편하였습니다.

 


반면, 온조는 기원전 18년, 하남 위례성(서울의 몽촌토성 또는 풍납토성으로 추정됨)에 도읍을 정했고 백성들이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소서노 또한, 장남인 비류 대신 온조가 있는 위례성으로 갔습니다.


이에 부끄러움을 느낀 비류가 죽자, 미추홀에 있던 백성들이 위례성으로 향했으며 나라 이름을 백제라 했다고 합니다.

백제의 상징 금동대향로(출처 : commons.wikimedia.org)

 

 

백제를 건국한 이후의 소서노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국모의 위치에서 온조와 함께 백제를 다스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 소서노,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다!

시간이 흘러 기원전 6년,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소서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온조왕은 

 

“나라 동쪽에는 낙랑(한사군 중 하나)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우리 강역을 침범하기 때문에 편안한 나날이 적다. 하물며 요즘에는 이상한 조짐이 계속 나타나고 국모(온조의 어머니, 소서노)마저 세상을 떠나셔서 스스로 편안할 수 없는 상태이니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라며 천도를 강행했습니다.

온조왕 우표(출처 : commons.wikimedia.org)

 


또한, 몇 년 뒤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이 불타는 일이 발생하자 백제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소서노를 모시는 사당을 세워 국모를 넘어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받들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고려와 거란의 전쟁에 대해 3부작으로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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