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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와 거란의 전쟁

거란의 2차 침입과 전쟁영웅들의 등장

by 역사채우기 2021.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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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FsL4I__gyeQ

 

지난 시간의 거란의 1차 침입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거란의 2차 침입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거란의 2차 침입을 다루기에 앞서 지난 시간에 대한 설명은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4

 

거란의 1차 침입과 서희의 외교담판

https://youtu.be/IwuBxmN-Ktk 이번 시간에는 거란의 고려 1차 침입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926년에 발해가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한 후 고려로 망명해오는 유민들을 왕건(고려의 태조)은 후하게 대

historicalhistory.tistory.com

 

 


993년에 거란의 1차 침입이 있었으나 서희의 외교담판을 통해 요나라(거란)는 군사를 철수시켰으며, 고려는 강동 6주(흥화진,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를 획득하는 대신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기로 약속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비밀리에 송나라로 사신을 보내 관계를 지속하였고, 강동 6주에는 군사적 요충지의 이점을 살려 요새화 시켰습니다.

서희의 담판으로 획득한 강동 6주

 


한편, 요나라는 송나라와 전연의 맹약(송나라 진종과 요나라 성종 사이에 체결된 강화조약)을 맺어 대송전선이 안정되자 다시 한번 고려를 침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 강조의 정변

그러던 때 고려에서는 목종(고려의 7대 국왕)의 어머니인 천추태후김치양이 전횡을 일삼았으며, 둘 사이에 낳은 아들을 다음 왕위로 잇기 위해 왕건의 유일한 혈통인 대량원군(훗날 현종, 고려의 8대 국왕)의 암살을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습니다.


후에 이 음모를 알게 된 목종은 당시 서북면도순검사로 재직하고 있던 강조를 불러 왕궁을 호위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강조(드라마 천추태후 중에서)

 


그런데 강조는 왕명을 받들고 개경(고려의 수도)으로 향하던 중 목종이 죽었으며, 이를 기회로 김치양 일파가 왕위를 빼앗으려 한다는 헛소문을 믿고는 휘하의 5천 군사까지 이끌고 내려옵니다.

 

 

그러던 중 강조목종이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에 강조는 반역자로 몰릴까 당황하였으나 이내 부하들이 여기까지 왔으니 그칠 수 없다고 주장하자 개경에 입성한 후 목종을 폐위시켰고 대량원군 왕순을 왕으로 맞이하였습니다.

고려 현종(대량원군 왕순)(드라마 천추태후 중에서)


그리고는 김치양과 그의 아들 등 7명을 죽였으며, 그 일파 30여 명을 귀양 보내는 한편 목종도 시해하였습니다.

 

 


| 통주 전투

이 소식은 요나라에도 알려졌고, 1010년 11월, 요 성종(거란의 6대 황제)은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의군천병이라 칭하는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습니다.

요 성종(드라마 천추태후 중에서)


이윽고 거란군은 흥화진(강동 6주 중 한 곳, 현재 신의주)을 포위한 후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도순검사 양규는 3천의 병력으로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켜냈습니다.

3,000 VS 400,000

 


흥화진이 함락되지 않자 요 성종은 20만 군사를 무로대에 주둔시키고 남은 20만 군사는 통주(강동 6주 중 한 곳, 현재 선천)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통주에는 행영도통사로 임명된 강조가 이끄는 30만 대군이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지키고 있었으며, 검차를 앞세워 거란 기병의 기동을 약화시킨 후 거란군을 여러 차례 물리쳤습니다.

검차(출처 : KBS역사스페셜)

 


이에 강조는 자신감을 얻고 부하들과 바둑을 두었는데 이때, 거란의 선봉 야율분노야율적로가 강조의 군영을 침입하자 강조는

 

"입안의 음식처럼 적군이 적으면 오히려 좋지 않으니 많이 들어오게 놔두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거란군의 대거 침입으로 강조의 진영이 돌파되었고, 행영도통사 강조와 행영부통사 이현운 등이 포로가 되었으며 도주하던 고려군 3만여 명이 전사하였습니다. (통주 전투)

 


이후 거란군은 승세를 타고 완함령과 통주성까지 공격하였으나 김훈최질 등의 분전으로 더 이상의 추격을 막아냈습니다.

 

한편, 요 성종이 포로로 잡힌 강조에게 여러 번 신하가 되기를 요청하였으나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라며 끝까지 반대했지만 이현운은 거란의 신하가 되겠다고 말하자 강조가 이현운을 발로 차면서 "너는 고려 사람으로 어찌 그따위로 말하느냐"고 화를 내며 끝까지 고려에 충심을 보였으나 결국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 서경 공방전

이 무렵 고려 현종통주 전투의 소식을 듣고 중랑장 지채문서경(평양)으로 보내 구원하게 하였으나 지채문이 서경으로 도착하기 전에 이미 서경 부유수 원종석은 거란에 항복한다는 표문을 만든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지채문이 서경에 도착했을 때도 성문을 열지 않으니 같이 온 최창이 분대어사 조자기를 불러 꾸짖자 성문을 열었고, 이들은 원종석에게 성을 지키자고 했으나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지채문과 최창은 몰래 항복 사절을 기습해 죽이고 표문을 불태워 항전 의식을 고취하였고, 얼마 후 동북계 도순검사 탁사정이 지원군을 거느리고 합류하였습니다.

 


이때 고려 조정이 거란에 항복 사절을 보내자 요 성종은 서경에 점거 병력을 보냈는데 지채문과 탁사정이 이들을 공격하여 물리쳤고, 임원역 남쪽에서 3천여 명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이루어 내지만 거란군의 역습에 패주하고 성은 포위되었습니다.

 


한편, 서경에는 거란의 1차 침입 때 안융진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도수(발해 왕실의 후손)도 있었는데 탁사정

 

"그대가 동문으로, 나는 서문으로 나가 앞뒤에서 협공하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다."

 

라며 속이고는 도망가버렸습니다.

 


하지만 대도수는 탁사정의 말대로 동문으로 나왔으나 속은 것을 알고 전력 차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거란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대도수(드라마 천추태후 중에서)

 


이로써 서경은 풍전등화의 위기였으나 통군녹사 조원과 애수진장 강민첨(이후 귀주대첩에서도 활약함) 등이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고 성을 굳게 지켜 함락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 현종의 피난길과 지채문의 호위 

이후 거란군이 곽주(강동 6주 중 한 곳으로 현재의 곽산) 침입하자 방어사 조성유는 도망갔고, 남은 군사들이 거란의 공격에 맞섰으나 성이 함락되었고 6천 명을 뽑아 성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양규가 흥화진에서 7백 명을 이끌고 통주로 이동해서 1천의 군사를 수습한 후 곽주를 급습하여 성을 탈환하고, 포로로 잡혀있던 7천여 명을 구출하였습니다.

양규의 이동경로

 


하지만 거란 군대는 주요 요충지를 후방에 남겨둔 채 개경으로 남하하였고, 지채문이 서경의 소식을 전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또다시 항복론이 대두되었으나 강감찬(훗날 귀주대첩의 영웅)의 주장으로 항전을 지속하고, 현종은 몽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현종은 왕비와 지채문, 이부시랑 채충순, 금군 50명 등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적성현 단조역(경기 연천)에서 현종 일행에게 활을 겨누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지채문이 활을 쏴서 물리쳤고, 창화현에서는 향리가 "주상께서는 저의 이름과 얼굴을 아십니까?"라고 물으며 무례하게 구니 현종이 무시하자 향리가 사람을 시켜 하공진이 채충순을 잡으러 온다고 소리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현종 일행 중 일부가 도망쳤고 밤에 누군가 공격해오자 그나마 남아있던 신하와 환관, 궁녀들도 도망갔으나 지채문이 침착하게 대응하여 막을 수 있었습니다.

 

 

지채문하공진을 만나 지난밤의 소행이 하공진의 소행이 아님을 밝혀내고, 하공진이 거느린 군사 20여 명이 현종 일행에 합류하였습니다.

끝까지 현종을 호위한 지채문(드라마 천추태후 중에서)

 


현종을 알현한 하공진은 거란군의 철수를 위해 자신이 직접 거란 군영에 갈 것을 자청하였고, 현종이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이때 하공진이 창화현(경기 양주)에서 거란의 선봉과 조우하였고, 거란 측이 국왕이 어디 있는지를 묻자 하공진은 남쪽으로 몇 만리 되는 곳으로 피난 갔다고 속여 거란군의 추격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거란군과 고려 현종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하공진요 성종에게 회군을 요청하자 후방이 불안정하다고 여긴 요 성종이 이를 허락하여 하공진을 볼모로 삼고 회군하였습니다.

거란군이 철수하는데 큰 역할을 한 하공진(드라마 천추태후 중에서)

 

 

 

| 양규와 김숙흥, 정성의 활약 

그러나 고려군은 회군하는 거란군을 절대 고이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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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별장 김숙흥은 거란군 1만여 명의 목을 베었고, 양규무로대에서 거란군 2천여 명의 목을 베고, 포로로 잡혀있던 2천여 명을 구출하였습니다.


이후 이수에서 2천 5백여 명을 죽이고 포로 1천여 명을 구출하였으며, 사흘 뒤 여리참에서는 1천여 명을 죽이고 포로 1천여 명을 구해냈으며, 애전에서 1천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양규와 함께 활약한 김숙흥(드라마 천추태후 중에서)

 


얼마 뒤 양규와 김숙흥 부대는 요 성종이 지휘하는 거란군 본대와 맞닥뜨렸고, 양규는 김숙흥과 함께 분전하였으나,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지면서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거란군은 마침내 압록강을 건너 요나라 본토로 퇴각하려 하였으나 흥화진사 정성이 거란군을 추격하고 있었고, 거란군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고려군이 후미에서 공격하니 무수히 많은 거란 군사들이 전사하였습니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의 2차 전쟁은 고려의 승리로 마무리되었고, 거란군은 고려의 항복을 끝내 받지 못한 채 큰 피해만 입고 돌아갔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거란의 3차 침입귀주대첩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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