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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와 거란의 전쟁

고려와 거란의 3차 전쟁, 귀주대첩

by 역사채우기 2021.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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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2Ngd-h8D5kE

 

 

이번 시간에는 거란의 3차 침입귀주대첩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고려는 993년의 거란의 1차 침입과 1010년의 2차 침입을 연이어 막아내었고, 2차 침입 때 거란군의 회군 조건으로 고려는 강동 6주(흥화진,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의 반환과 왕의 입조를 약속했으나 2가지 모두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획득한 강동6주

 

 

거란의 3차 침입 이전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5

 

거란의 2차 침입과 전쟁영웅들의 등장

https://youtu.be/FsL4I__gyeQ 지난 시간의 거란의 1차 침입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거란의 2차 침입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거란의 2차 침입을 다루기에 앞서 지난 시간에 대한 설명은 아래 게시물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이에 거란(요나라)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1014년 6월부터 1018년 10월까지 여러 차례 고려를 침략하여 국지전을 벌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거란이 연이어 침입하자 1018년 12월,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내사사인 박종검과 병부낭중 유참을 판관으로 각각 임명한 후 20만 8천 3백 명의 군사와 함께 안주에 주둔시켜 거란의 공격에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강감찬 표준영정(좌)과 강감찬 동상(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018년 12월, 거란의 소배압(거란의 1차 침입 때 침입한 소손녕의 형)이 친위군인 우피실군을 포함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였습니다.

 

 


| 거란의 3차 침입

이에 대응하여 강감찬거란의 2차 침입 때 시작부터 끝까지 거란군을 괴롭혔던 장소인 *흥화진에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켰고,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냇물을 막았다가 거란군이 당도하자 둑을 터뜨리니 물이 범람하여 거란군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 흥화진 : 강동 6주 중 한 곳, 현재 신의주

거란의 2ㆍ3차 침입 때 크게 활약한 흥화진의 위치

 


이때 강감찬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매복시켰던 군사를 풀어 거란군을 일제히 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거란군이 2차 침입 때와 마찬가지로 고려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수도인 개경(개성) 방향으로 진격하자 강민첨이 자주의 내구산까지 추격하여 거란군을 공격했고, 시랑 조원서경(평양) 근방 마탄에서 거란군 1만 명을 전사시키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1019년 1월, 고려의 연이은 공격에도 거란군은 개경 가까이 진군 중이었고, 상당수의 군사를 안주에 배치했기 때문에 개경을 지킬 군사가 적어 당황한 고려조정은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개경을 방어하게 하였고, 동북면병마사가 개경으로 3천 3백 명의 군사를 지원하였습니다.

 


게다가 현종(고려의 8대 국왕)이 이번에는 몽진하지 않고 개경에서 결사항전의 뜻을 밝히며, 개경으로 오는 길목에 청야작전을 실시하여 들판의 곡식을 모두 거두고, 성 밖의 민가를 성안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현종 : 두 번의 몽진은 없다!

결사항전을 택한 현종(드라마 천추태후 중에서)

 

 

이윽고 거란군은 개경과 100리 떨어진 신은현에 당도하였고, 소배압은 야율호덕을 개경으로 보내 자신들이 회군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 후 방비가 느슨해진 틈을 노려 군사 3백 명을 개경에 잠입시키려 했으나 금교역에서 고려군 100명에게 기습당해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거란군은 개경을 함락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정말로 회군을 시작하였습니다.

 

 

 

| 귀주대첩

거란의 2차 침입 때와 마찬가지로 고려는 회군하는 거란군을 고이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거란군이 귀주 방면으로 퇴각하자 강감찬은 고려군을 귀주(강동 6주의 한 곳으로 현재 평안북도 구성시)로 집결시켰으나 병마판관 김종현이 이끄는 1만의 군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귀주성

 


귀주에는 양군 도합 30만(거란의 10만+고려군 20만 대군)에 가까운 병력이 대치하게 되었고, 강감찬이 동쪽 교외에서 요격했는데 거란군은 이전까지 몇 달 동안 고려군에게 공격받았고, 후방이 차단된 상태에서 고려의 청야작전으로 인해 보급이 잘 안 된 상태에서도 병력이 2배나 많은 고려군을 상대로 밀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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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의 고려군과 10만의 거란군의 대치 상황


이렇게 막상막하의 일전을 벌이는 와중에 김종현의 1만 군사가 거란군의 후방을 공격하였고, 이에 때맞추어 남풍이 세차게 불었습니다.

 


이때 고려군은 남쪽에 진영이 있었고, 거란군은 북쪽에 진영이 있었기 때문에 역풍을 맞은 거란군은 전투하면서 몸 가누기도 힘들었던 반면, 고려군은 순풍을 타고 진격하면서 활을 쏘기에도 수월해졌습니다.


그러자 거란군은 패주하여 달아나기 시작했으며,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수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고려사]에는 이 전투로 귀주에 거란군의 시체가 들을 덮었으며 사로잡은 포로와 노획한 말, 낙타, 갑옷, 병장기가 셀 수 없을 지경이었고, 거란이 이토록 참혹하게 패배한 것은 전례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고려와 거란의 3차 전쟁은 고려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이 전투 이후로 거란은 더는 고려에 대규모 군사를 출정시키지 못했고, 국제정세 또한 고려, 송나라, 요나라(거란)가 서로 균형을 이루게 되어 고려는 평화를 누리는 동시에 약 100년에 이르는 전성시대를 꽃피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대에도 이를 기념하여 강감찬의 귀주대첩(고려)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고구려), 이순신의 한산도대첩(조선)과 함께 한국사의 3대 대첩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고려의 여진정벌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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