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49] 북관대첩(3) 길주성 전투와 함경도 전역 탈환

by 역사채우기 2021. 12. 12.
반응형

국세필, 국경인, 정말수 등의 순왜 처단과 6진, 명천 지방을 회복하여 한창 기세를 드높이던 정문부와 의병들은 곧장 길주성으로 진군하여 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이후 정문부는 공성전을 전개하는 대신 앞서 장덕산 전투에서 일본군이 추위에 취약했던 점에 착안하여 성을 완전히 포위한 채 땔감을 구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추위에 취약한 일본군이 땔감마저 없다면 얼어죽기 십상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영동관 책성에 주둔한 일본군이 임명촌을 공격해 노략질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정문부는 길주성 포위를 굳힌 채 일부 군사를 빼서 노략질하던 일본군 쪽으로 칼끝을 돌렸고, 수급 60두를 취했습니다.

이에 길주성과 책성에 있던 일본군은 감히 성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정문부는 책성도 함께 포위하였습니다.

반응형

마천령 사진(기슭에 영동관 책성이 위치해있다)(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1593년 1월, 안변에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는 길주와 책성의 일본군이 고립되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고, 가토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북쪽으로 진군하였습니다.

현재 북한 강원도에 속한 안변군



1월 21일, 가토는 길주를 구원하기 위해 선봉대 2백여 명을 보냈고, 이들이 단천을 지나고 있을 때 단천군수 강찬이 이끄는 조선군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강찬은 일부러 패한 척 후퇴하였고, 이를 일본군이 추격해왔습니다.

이때 미리 매복해있던 유경천의 군사들이 사방에서 포위하여 적군을 마구 도륙하니 일본군은 30명만 겨우 전장을 빠져나왔습니다.



며칠 후, 가토의 본대가 단천에 다다르자 유경천과 강찬은 모두 후퇴하여 정문부가 있던 본대로 합류합니다.

이후 가토의 일본군이 영동관 책성으로 오자 정문부도 본대를 이끌고 성의 외곽에서 치열한 접전을 펼쳤습니다.

길주성(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정문부의 의병은 병력의 수에서 밀렸던 데다가 일부 군대가 책성과 길주성 포위를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정문부는 3번의 교전에서 모두 패하고 책성과 길주성 포위도 푼 채 경성으로 퇴각하였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아군을 구원하러 출정할 때 "재차 관북을 평정하겠다"라며 호언장담했지만, 정문부의 군대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계속되는 폭설과 추위가 큰 부담이었습니다.

함경도 점령의 두번째 장애물 : 추위(첫번째 장애물은 의병)


이에 가토는 북으로 진군하지 않고 책성과 길주성의 군사를 구원한 것에 만족하고 남쪽으로 퇴각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문부도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추격했지만, 가토는 이미 멀리 가고 난 뒤였기 때문에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함경도의 전투는 모두 끝이 났고, 조선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가 북한으로 반환된 북관대첩비(출처 : 위키백과)




그동안 정문부가 활동했던 순왜(국경인, 국세필, 정말수)의 처단과 6진의 회복, 명천 탈환, 석성령ㆍ장덕산 전투, 길주ㆍ영동관 책성 전투를 모두 일컬어 북관대첩이라 합니다.

이로써 함경도 전역은 모두 수복되었고, 가토는 1593년 2월 29일, 한양으로 도착하였습니다.

가토가 한양에 도착한 후 부대를 재정비하니 지난 1년간 전사자가 9천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가토가 조선에 상륙한 후 큰 전투 없이 함경도에 이르렀으니 9천여 명이나 되는 손실은 정문부와 그를 따르는 의병의 활약 덕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문부 장군 표준 영정



하지만 이렇게 큰 공을 세운 정문부와 의병은 전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순찰사 윤탁연이 직급이 낮은 정문부를 시기했고, 정문부가 윤탁연의 지시를 따르지 않자 그간 정문부가 세운 전공을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보고했으며, 그간의 전투에서 획득한 수급을 빼앗아 자신의 군사에게 주었습니다.

이후 실상을 조사하러 나온 관료는 윤탁연이 바친 뇌물을 받고 정문부의 공을 바로 세우지 않으니 함경도의 백성 중 분개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뇌물로 관료를 매수한 윤탁연

 

의병장 정문부의 전공을 순찰사 윤탁연이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정문부의 부하가 왜군 목을 가지고 함경남도를 지나면 모두 빼앗아 자기 수하 군사들에게 주었다.
윤탁연이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에게 옷과 월동 장비를 주었으므로 그들이 조정에 돌아가서는 모두가 윤탁연을 옹호하고 정문부의 공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

 


이후 조정에서는 종성부사 정현룡에게 공이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함경도 병사로 임명하였고, 정문부는 순왜를 처단한 공로만 인정받고 영흥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정문부는 선무공신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1624년, *이괄의 난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고문을 받고 원통해 하다가 5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전쟁영웅의 비참함 최후

* 이괄의 난 : 1624년, 인조반정 때 참여한 이괄이 논공행상 때 2등 공신으로 밀려난 것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대규모 반란

의정부에 위치한 정문부 장군 묘(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다음 시간에는 창원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