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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26] 영남 3대 의병장의 우척현 전투

by 역사채우기 2021.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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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제6군의 전라도 공격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 제1군이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 제2군이 함경도로 진출할 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 제6군은 전라도 점령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는 곽재우의 의병에게 정암진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후 이치와 웅치 고개를 넘어서 전주성으로 향하려 했으나 이치는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끄는 조선군의 저항에 가로막혀 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웅치는 의병장 황박과 정담이복남의 관군이 뚫리긴 했으나 웅치에서 살아남은 조선군과 황진의 활약으로 안덕원에서 패배하면서 금산으로 퇴각했고, 거기다 고경명의 의병과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이 금산성을 공격하기까지 했으니 고바야카와의 군대는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전라도 공격마저 실패로 돌아가는 듯했습니다.

이치, 웅치, 금산에서 벌어진 전투(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 우척현 전투

그러나 7월 9일, 고바야카와는 전라도 공격을 포기하지 않고 별동대 1,500명을 거창으로 보냈습니다.
7월 10일, 일본군 별동대는 거창으로 가기 위해 *우척현을 지났습니다.
* 우척현 : 김천시 지례면에서 거창군 웅양면 사이에 있는 고개, 우두령이라고도 함

우척현 위치(A)(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당시 그곳에는 김면*정인홍이 이끄는 의병과 초유사 김성일이 보낸 만호 황응남과 판관 이형이 이끄는 관군을 포함해 2천 명이 넘는 군사들이 모여있었습니다.

* 정인홍 : 북인 계열의 문신으로 곽재우와 함께 영남 3대 의병장으로 불리며 이후에 영의정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때 김면은 임진왜란 시기 영남 지방의 3대 의병장으로 꼽힐 만큼 통솔력이 좋았고, 4~5일 만에 군사 2천 명을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척현 전투의 주역인 김면 장군의 유적 전경(출처 : 문화재청)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근왕하려고 했으나 정인홍이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 하여 고령에서 군사를 모았다.
김면은 고령의 군세가 작아 거창으로 옮겨갔는데 그곳에서 곽준, 문위, 윤경남, 박정번, 유중룡을 참모로 삼고, 박을 시켜 군량을 모으게 하였다.
그렇게 4~5일 동안에 군사 2,000명이 모였다.
- [연려실기술]

 

김면이 이끄는 군사는 일본군이 우척현을 지난다는 첩보를 받고 우척현 일대의 지형지물을 적극 활용하여 매복하였습니다. 

우척현 인근에는 양쪽으로 산이 있어서 매복하기 좋은 지형입니다. (지도 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 선봉대가 형형색색의 깃발을 휘날리며 우척현을 오르자 전방에 대기하던 조선군과 고개 양쪽에 매복해있던 병사들이 삼면에서 활을 쏘았습니다.


그러자 일본군은 크게 당황하여 대열이 무너진 채 도망가기 시작했고, 조선군은 꽹과리와 징을 치면서 사방에서 쏟아져 나와 함성을 지르며 추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지형을 활용한 매복과 기습 작전이 위력을 발휘했던 만큼 인근의 지리에 밝은 *산척의 공이 매우 컸으며, 만호 황응남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 산척 : 산골에서 사냥이나 약초를 캐면서 생활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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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을 주로 했던 산척은 우수한 사격 실력을 보유했을 것입니다. (드라마 추노 중에서)


하지만 판관 이형은 산척을 이끌고 적을 추격하다가 아쉽게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척현 전투에서 패한 고바야카와의 일본 제6군은 또다시 전라도 공격에 실패하면서 피해만 잔뜩 본 채 한동안 전라도 공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임진왜란 초기 무너지는 조선군을 보면서 조선군을 우습게 생각했을 일본 수군과 일본 제6군은 조선군이 결코 약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 무렵 남쪽 바다에서는 그동안의 전황을 뒤바꿀 새로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다음 시간에는 한산도 대첩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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