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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89] 황석산성 전투(2) 백사림의 도주와 피로 물든 바위

by 역사채우기 2022.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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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사림의 도주, 그리고 붕괴

조선군은 높고 험준한 곳을 따라 유리한 지형을 끼고 싸우고 있었지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이 몰려드는 일본군 정예병을 당해낼 수 없었고,  전황이 점점 조선군에 불리해지자 전임 김해부사 백사림은 자기 가족을 먼저 성 밖으로 빼낸 뒤 자신도 성문을 열고 도망쳤습니다.

그러자 일본군이 북문을 통해 벌떼같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가뜩이나 불리했던 상황에서 성문까지 열리자 황석산성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 성문을 연 백사림과 그 가족이 살아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성문을 열어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일본군과의 밀약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황석산성(출처 : 문화재청)

 


결국, 목숨을 걸고 싸우던 군민들은 쏟아지는 일본군을 보고 동요하여 가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치기 시작했고, 안음현감 곽준의 두 아들 곽이상곽이후는 후일을 도모하자며 아버지께 피신을 권고하였으나 곽준

 

"여기가 내가 죽을 자리다. 나는 이곳을 지키는 직책이 있으니 살아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너희들에게는 책임이 없으니 서둘러 목숨을 지키거라."

라고 말하며 투지를 불태웠습니다.

 

아버지의 이 같은 결의를 본 두 아들도 감동하여 최후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고, 전임 함양군수 조종도 역시 일본군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 황석산성 함락의 여파

8월 18일, 황석산성은 3일간의 전투 끝에 결국 함락되었고, 남원성이 일본 좌군에 의해 함락되었을 때처럼 황석산성이 함락된 후에도 일본군은 남아있던 조선군과 백성들을 남녀노소 불문하고 남김없이 죽였으며, 성 안에 비축해두었던 무기와 식량까지 모두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조선군은 열심히 싸웠으나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청야작전을 펼치면서 인근의 군사와 백성, 식량 등을 모두 한곳으로 모았기 때문에 피해가 더욱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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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함락된 이후(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안음현감 곽준의 며느리, 즉, 맏아들 곽이상의 부인은 황석산성에서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목숨을 끊었으며, 곽준의 딸 역시 살아남았으나 남편의 죽음, 그리고 친정집의 부고를 전해 듣고 망연자실하여 목을 매 자살했다고 합니다.


이후 황석산성에서 전사한 군민들을 기리기 위해 1714년(숙종 40년)에 '황암사'라는 사당이 세워졌고, 현재 황석산성에는 성이 함락되면서 부녀자들이 일본군을 피해 절벽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으면서 생긴 흔적으로 바위가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어 피바위라 부르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8월 18일(성이 함락된 날)을 기해 황석산성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황석산성에서 전사한 군민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황암사




한편, 일본군은 좌군이 남원성함락시키고, 우군이 황석산성함락시키면서 임진년(1592년)에 감히 넘보지 못했던 전라도 곳곳에서 약탈과 학살을 자행하며 그 위세가 그칠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8월 24일, 일본 좌군과 우군은 전주에서 합류한 뒤 명나라 유격장군 진우충과 전주 부윤 박경신이 도망친 전주무혈입성하였습니다.

일본 좌군과 우군의 진군로(출처 : 역사저널 그날)

 

 

그리고 일본 우군은 여세를 몰아 전라도를 넘어 충청도까지 세력을 넓히던 중 직산(충남 천안시) 일대에서 제독 마귀와 경리 양호가 이끄는 명나라 군대와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직산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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