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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87] 남원성전투(2) 전세의 불리함을 딛고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라!

by 역사채우기 2022.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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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성 전투

8월 13일, 일본 좌군은 남원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북문, 동문은 하치스카 이에마사, 서문은 고니시 유키나가, 남문은 우키다 히데이에가 담당하기로 정한 후 소수의 병사를 성의 북문으로 보내 조명연합군을 도발하게 하였습니다.

일본군의 남원성 침공 작전도



그러자 부총병 양원이 이복남에게 활로 적병을 제압할 것을 지시하니 전라병사 이복남

 

"왜병은 조총으로 잡아야 한다"

 

라고 말하며 조총병으로 적병 여럿을 사살하였습니다.
이복남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몇 시간 후 일본군 조총부대가 성 앞으로 접근하자 조선군은 승자총통과 대완구로 비격진천뢰를 쏘아 적병을 격퇴했고, 양원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대비하여 성 입구에 마름쇠를 깔아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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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격진천뢰 폭발하는 장면(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8월 14일, 일본군은 남원성을 겹겹이 포위한 뒤 인근의 민가와 절을 헐어서 누각과 사다리 등의 공성기구를 만들고, 민가의 지붕으로 짚단을 만든 후 참호를 메워 공격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같은 날, 공격 준비를 마친 일본군이 누각과 조총병을 앞세워 남원성의 사대문을 일제히 공격하면서 공방전이 벌어졌고, 일본군의 압도적인 병력에 조명연합군이 밀리는 듯 보이자 부총병 양원은 자신의 기병 1천을 성 밖으로 보내 상황을 타개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일본군 1개 부대가 뒤를 보였고, 양원의 기병이 이들을 추격하다가 매복해있던 적병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겨우 돌아왔습니다.



8월 15일, 양원은 다시 한번 전주의 진우충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으나 진우충은 이번에도 지원을 거부하였고, 비가 많이 내려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가 되니 명나라군과 일본군은 양측 진영에 군사를 보내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협상하는 명나라군과 일본군(출처 : 문화재청)



이때 양측 사이에 어떤 내용의 협상이 오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에는 당시의 협상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군 장수들이 양원에게 성을 비우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양원은 "나는 열다섯 살 때 장수가 된 이후 천하를 다니면서 싸워서 이기지 않은 전쟁이 없었는데 물러나라고 하니 가소롭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일본군이 “천여 명 패잔병이 어찌 대군을 당해내겠소. 명나라 장수가 조선에 무슨 은혜를 입었다고 후회할 일을 하는 것이오? 라고 말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고 전해집니다.




| 최후의 전투

그날 밤, 일본군은 잡초를 베고 묶어서 만든 풀단으로 성 외곽의 해자를 메운 다음 풀단을 성벽 높이까지 쌓은 뒤 그것을 발판 삼아 공격을 재개하였습니다. 

이 방법으로 일본군 대병력은 어렵지 않게 성벽으로 난입했고, 조명연합군은 밀려드는 일본군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였습니다. 

조명연합군의 처절한 공방전은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으나 남문, 동문, 서문이 각각 무너지면서 패색이 짙어졌고, 결국에는 이복남이 지키고 있는 북문으로 일본군 병력 전부가 쇄도하였습니다.

남원성 전투 기록화(출처 : 문화재청)



이같은 상황 속에서 부총병 양원이 휘하의 기병 50명과 함께 남원성을 빠져나가 버리니 전라병사 이복남의 지휘하에 조명연합군, 그리고 백성들까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방어에 나섰으나 기울어진 전황을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이복남,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구례현감 이원춘, 남원부사 임현 등은 화약고에 불을 붙여 장렬히 산화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은 조명연합군과 백성들이 모두 일본군의 손에 죽임을 당하면서 남원성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비참한 상황을 남원성 전투에 종군한 일본 승려 쿄넨은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성안 사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자는 없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다.
알 수 없는 이 세상살이, 모두 죽어서 사라지는구나

- 남원성 전투에 종군한 일본 승려 쿄넨이 쓴 [조선일기]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알 수 없으나 조명연합군은 남원성에 있던 사람(백성 포함 대략 1만 1천 명) 중 부총병 양원과 휘하의 50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사하였고, 시간이 지나 남원에 온 백성들이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백성들과 조명연합군의 시신을 모아 합장하니 이것이 '만인의총'입니다.

만인의총(출처 : 문화재청)

 

 


| 살아남은 자의 최후

한편, 남원성에서 빠져나간 부총병 양원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명나라 경리 양호에게 처형당해 목이 한양에 효수되었습니다.

부총병 양원이 처형당한 이유는 패전의 책임이 제일 크긴 하지만 그 이면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남원성 전투 이후, 인근에서는 양원이 일본군과 협상하던 8월 15일에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적과 내통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것이 혐의로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도 8월 15일 저녁, 일본군이 공격해오기 직전에 명나라 군사들이 말 안장을 준비하고 도망칠 준비를 했다는 기록과 성이 함락될 무렵, 일본군이 도망치던 명나라군을 공격하다가 그 무리에 양원이 있는 것을 알아보고는 공격을 멈추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주를 지키던 명나라 유격장군 진우충은 2번이나 남원성 지원 요청을 거부한 데 이어 남원성이 함락되자 전주부윤 박경신과 함께 전주성을 비우고 달아나 일본군이 전주성을 무혈입성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일본 좌군과 우군의 진군로(출처 : 역사저널 그날)



이에 진우충은 곤장 100대의 형벌을 받게 되었고, 박경신은 파직당했습니다.



같은 날, 모리 히데모토가 이끄는 7만 3천의 우군은 황석산성을 앞에 두고 조선군과 대치하게 되는데...



다음 시간에는 황석산성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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