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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91] 직산 전투(2) 직산 전투에서 활약한 원숭이 기병!?

by 역사채우기 2022.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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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산 전투의 평가

[선조실록]에는 직산 전투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독 접반사(중국 사신을 수행하며 접대하던 임시 관직) 장운익이 아뢰기를,

직산의 전쟁터로부터 돌아온 중국 병사가 말하기를 ‘천안과 직산 사이에서 뜻밖에도 왜적의 선봉이 모두 흰 옷을 입고 들판을 뒤덮어 오기에, 중국 병사들이 처음에는 조선 사람으로 생각하여 진격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에 왜적의 선봉이 먼저 포를 쏘므로 중국 병사들이 일시에 말을 달려 나가 시살하며 한참 동안 교전하였는데, 화살에 맞거나 곤봉에 맞아 죽은 왜적이 거의 5백∼6백 명에 이르렀고 수급은 30여 급을 베었으며 해 부총(부총병 해생)과 양 참정(참장 양등산)도 각각 손수 수급 2개를 베었다.

그런데 왜적이 산에 올라가 백기를 드니, 천안의 대군이 즉각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므로 중과부적으로 각자 퇴각하여 지켰는데 해 부총 등 네 장수는 지난밤에 직산을 떠너 올라오고 있으며 중국 병사들도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 1597년 9월 9일의 [선조실록]

 


이 전투에서 명군이 일본군의 북진을 저지하면서 여차하면 조선의 수도 한양까지 재점령하려던 일본군의 계획은 흐지부지되었고, 명나라에서는 이 전투를 *임진왜란의 3대전으로 꼽을 정도로 높게 평가했습니다.

* 명나라가 뽑은 임진왜란의 3대전 : 4차 평양성 전투, 행주대첩, 직산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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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탈환도(4차 평양성 전투)(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또한, 조선의 국왕 선조는 의병과 관군이 큰 공을 세우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에 이들의 공을 낮추고 명군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이 전투를 매우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선조 : 임진왜란이 끝난다면 그것은 오로지 명나라군 덕분이다.\

 

상(선조)이 말하기를,
"흉적이 조금 물러가고 종묘사직이 다시 돌아왔으니 이는 참으로 대인의 공덕이라 감사함을 무엇으로 말하겠습니까. 절을 하여 사례하겠습니다."
하니, 경리(명나라 경리 양호)가 말하기를,
"이게 무슨 말씀이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 이러한 예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 1597년 10월 20일의 [선조실록]

 



| 직산 전투와 원숭이 기병?

18C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는 직산 전투에서 명군의 일원으로 원숭이 기병이 활약했다는 대목이 있어 뭇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명나라 장수) 양호는 중무장한 기병 4,000명과 교란용 원숭이 기병 수백 마리를 이끌고 가서 소사하 다리 아래 들판이 끝나는 곳에 매복하게 하였다.
왜군이 숲처럼 빽빽한 대오를 이루어 직산으로부터 북상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거리가 100여 보가 되기 직전에 먼저 교란용 원숭이를 풀어놓았다.
원숭이는 말을 타고 채찍을 잡고서 말에 채찍을 가해서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왜군들은) 원숭이를 처음으로 보게 되자 사람인 듯 하면서도 사람이 아닌지라 모두 의아해하고 괴이하게 여겨 발을 멈추고 쳐다만 보았다.
적진에 바짝 다가서자 원숭이는 말에서 내려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왜적들은 원숭이를 사로잡거나 때려잡으려 하였으나 원숭이는 몸을 숨기고 도망 다니기를 잘해서 진영을 꿰뚫고 지나갔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또한, 같은 시기 연암 박지원이 쓴 [경리 양호 치제문]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농원(교란용 원숭이) 삼백이
한꺼번에 말을 달렸지
저 교활한 왜적들을
모조리 말굽 아래서 섬멸했네

 

 

뿐만 아니라, 이규경[오규경문장전산고]에도 위와 매우 유사한 부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적을 베어 죽일 때 군사들이 모두 붉은 옷이나 비단옷을 입고 등에는 원숭이 한 마리를 업었다.
원숭이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내달렸다.
원숭이가 좌충우돌하니 왜적이 처음 보고서 놀라고 혼란스러워 완전히 패하여 남은 이가 없었으니 원숭이 또한 전공을 세웠다고 하겠다.”

 

이를 종합해보면, 직산 전투에 참여한 원숭이 기병은 실제 원숭이였을 수도 있지만, 명군 휘하에 참전한 흑인 용병(해귀) 또는 원숭이와 유사한 외모를 가진 병사들을 위와 같이 묘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랫천조장사전별도에 수록된 해귀(포르투갈 용병)(왼쪽 아랫부분)

 


이 무렵, 일본군의 수륙병진 작전의 일환으로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일본 수군과 막대한 군수물자를 실은 수송선을 합친 333척의 대선단은 한 줌밖에 남지 않은 이순신의 잔여 조선 수군을 격멸하고 서해와 남해를 지나 일본 육군과 합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복직 후 첫 해전인 어란포 해전과 벽파진 해전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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