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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92]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by 역사채우기 2022.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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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군을 폐하라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뒤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부임 된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의 보고를 접한 그 날부터 남쪽으로 내려가 흩어진 군사와 군수품을 모았고,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12척의 전선을 인계받아 비로소 수군이라 할 수 있는 형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경상우수사 배설(드라마 불멸의이순신 중에서)



이렇게 이순신이 다시 군사들을 모아 수군 재건에 박차고 있을 무렵, 조정에서 한 통의 조서를 받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수군을 권율 휘하의 육군으로 편입시켜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싸우라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이는 한 줌밖에 없는 군사와 전선으로 어떻게든 일본군에게 수로를 내주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던 이순신에게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었으며, 조선이 바다를 내준다면 일본 수군은 이제야말로 남해와 서해를 거쳐 일본 육군에게 물자를 안정적으로 보급할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전황은 임진왜란 초반, 조선이 의주까지 수도를 옮기며 벼랑 끝까지 몰렸던 때보다도 더 위험해질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수륙병진작전 계획



그렇기 때문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적에게 바다를 내주는 일은 조선을 내주는 일이므로 12척의 전선으로 적을 맞아 싸울 뜻을 피력하는 장계를 올렸습니다.

* 이때는 아직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함대 1척이 합류하기 전이었으므로 배설이 인계한 판옥선 12척으로 적을 막겠다는 뜻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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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왜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

 

이 장계의 내용은 이순신이 임진년(1592년)부터 제해권을 틀어쥐고 일본군의 보급을 막았기 때문에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출하지 못했고, 지금 전선이 12척밖에 없다고 해서 수군을 없앤다면 일본군은 수륙병진 작전으로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진격하여 단숨에 수도 한양을 집어삼킬 것이니 이순신이 바다를 반드시 지켜내 조선을 구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이순신 장군 초상화



이후, 다행히 이순신의 장계가 받아들여지면서 조선군은 바다에서 싸울 기회가 주어졌지만, 장수는 물론이고 군사들의 사기까지 바닥을 치고 있어 조선 수군의 상황이 암울한 건 변함이 없었습니다.

 


| 어란포 해전

이러는 가운데, 8월 28일, 드디어 적이 어란포(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적선 8척이 생각지도 못하게 들어왔다.
뭇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 수사(배설)는 피하여 물러나고자 하였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몰아내도록 명하였다.
적선이 퇴각하자 추격하여 갈두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로 옮겼다.

- 1597년 8월 28일의 [난중일기]

 

당시 적의 규모는 수백 척이 넘는 대선단이었으나 이때는 조선 수군의 규모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8척의 전선만 접근해 온 상태였고, 조선 수군이 충분히 맞설 전력이었음에도 칠천량해전의 영향으로 겁을 먹거나 공포에 질린 군사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어란포와 갈두산의 위치(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그러나 이순신은 각 전선을 진두지휘하며 적선이 접근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반격을 가해 이들을 물리쳤고, 해남의 갈두산 앞바다까지 적선을 추격하다가 돌아온 후 장도로 진을 옮겼습니다.


이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등용된 후 첫 승리를 거두었으며, 칠천량해전 이후 꺼져가던 불씨를 조금이나마 되살리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후 50여 척의 적선이 뒤이어 이곳에 오고 있다는 첩보를 받은 이순신은 이날 저녁, 장도로 진영을 옮겼고, 다음 날에 진을 진도 벽파진(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다시 옮겼습니다.

진도 벽파정




다음 시간에 벽파진해전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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