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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64] 나오지 않는 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웅포해전(1)

by 역사채우기 2022.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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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의 제4차 평양성 전투로 평양성이 탈환되자 일본군의 기세가 꺾였다고 판단한 조선 조정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다시 한번 부산을 공격하여 일본군이 바다로 달아날 길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이순신은 명을 받들어 2월 2일에 42척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2월 7일에는 *견내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 2월 8일에는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전선 40척과 합류하였습니다.

* 견내량 :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사이의 좁은 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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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내량의 위치(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이렇게 다시 한번 연합함대를 구성한 조선 수군은 칠천도를 지나 부산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날씨가 좋지 않아 날이 풀리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씁니다.

2월 10일, 조선 수군은 부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웅포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일본 수군의 전선이 다수 정박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무시하고 부산으로 갈 경우 협공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이순신은 웅포의 일본군을 먼저 공격하기로 하였습니다.

* 웅포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웅포의 위치(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조선 수군은 쾌속선을 보내 일본군을 여러 번 바다로 유인하여 공격하려 했지만 한산도 대첩 이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전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고, 이순신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포구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인근의 *왜성에서 진입하는 조선 수군을 향해 조총만 쏘아댈 뿐이었습니다. 

* 한산도 대첩 이후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 교전을 최대한 피하는 대신 연안 곳곳에 왜성을 쌓아 조선 수군이 상륙하거나 부산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틀어막고 있었습니다.

웅천왜성의 성벽(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는 사이 밤이 되자 조선 수군은 하는 수 없이 소진포(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리)로 잠시 후퇴하였습니다.

2월 12일, 조선 수군은 다시 웅포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유인하였으나 일본군은 이번에도 유인책에 걸려들지 않았고, 조선 수군은 이번에도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칠천도로 물러났습니다.

칠천도와 소진포의 위치(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칠천도에 있는 동안 이순신은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에게 육군을 이끌고 웅포의 일본군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조선 육군이 웅포의 일본군을 공격한다면 일본군이 바다로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이순신이 바다에서 적을 수월하게 물리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며칠간 기상이 좋지 않아 공격을 나서지 못했던 조선 수군은 2월 18일, 다시 웅포를 향해 진군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웅포에 진입하기 전에 사도첨사 김완과 여도만호 김인영에게 매복을 지시한 후 일본군을 유인했는데 이번에는 일본군 전선 10여 척이 드디어 추격해오자 미리 숨어있던 전선과 후퇴하던 전선이 일거에 에워싸서 적선 5척을 분멸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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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의 유인책에 걸린 일본군(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이때 좌별도장 이설과 좌돌격장 이언량 등은 도망치는 적선을 추격하여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포구에 가까워지자 일본 육군의 사거리에 가까워져 적선을 완전히 격침시키거나 사로잡지는 못했습니다.


이 전투로 후방에 있던 일본군은 더더욱 포구 밖으로 나오려하지 않았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조선 수군은 사화랑(창원시 진해구 명동 부근)으로 물러나 휴식을 취했습니다.


2월 20일 새벽, 조선 수군은 또다시 웅포의 일본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기상 악화로 진군하지 못했으며, 2월 22일, 이순신은 마침내 웅포의 일본군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지시하였습니다.

이는 조선 수군의 5번째 웅포 출전이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수군의 첫 상륙작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웅포 해전에 대해 이어서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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