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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66] 제2차 진주성 전투(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광기 어린 분노

by 역사채우기 2022.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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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 탈환

1593년 4월 18일, 일본군이 수도 한양에서 철수한 후 남하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20일 만에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후 거의 1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때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옥포해전~웅포해전으로 이어지는 이순신 및 조선 수군의 활약과 더불어 전란 초기 패배와 도주하기에만 급급했던 관군의병과 합심하여 일본군에 결코 쉽게 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은 제대로 된 보급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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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일본군(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게다가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몰아내긴 했지만, 여전히 대군이 남아있었고, 제4차 평양성 전투에서의 압도적인 화력을 맛보았던 경험 때문에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은 당시 한양에 있던 대부분의 지휘부가 모여서 공격했지만, 권율에 의해 처참히 패배하면서 사기가 저하되었으므로 후에 한양을 공격받아 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남쪽으로 내려가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권율 장군 영정



그리고 자국이 아닌 조선 땅에서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명나라와 조선군의 반격으로 피해가 점점 불어나던 일본군 사이에 강화가 진행되었는데 정작 조선은 이 회담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명나라 측의 대표 유격장군 심유경과 일본 측의 대표 고니시 유키나가가 교섭을 진행하면서 명군은 한양을 철수한 후 남하하는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기로 서약하면서 조선군은 철천지원수와 같은 적이 물러가는 것을 추격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과 명나라의 강화회담



당시 조명연합군의 전시작전권명나라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진주성 공격 지시

그러던 중 전쟁의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강화 협상을 자신 쪽에 유리하게 하기 위해, 이후 전라도 공격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에서 패한 분풀이를 하기 위해 진주성 공격을 지시하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진주성에서 당한 패전을 보복하기 위해 전 병력을 동원해서 공략할 것.
진주목사의 목을 베어올 것.
그리고 진주성 내의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할 것.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 할지라도.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서



여기서 말하는 진주목사는 김시민 장군을 말하는 것이며, 일본군은 진주대첩에서 김시민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전 진주목사인 김시민(일본 측에서는 모쿠소 호간이라 부름)의 목을 베어오라 한 것이었습니다.

 

진주대첩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93

 

[임진왜란51] 진주대첩(1) 전운이 드리우는 진주성

9월 25일의 노현ㆍ창원성 전투를 모두 승리한 일본군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진출하는 관문인 진주성으로 향했습니다. 이 병력은 무려 3만이었으며, 그들을 이끄는 수장은 일본 제8군 선봉장이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94

 

[임진왜란52] 진주대첩(2) 계속되는 혈투

| 경상우병사 유숭인의 분투 10월 4일, 일본군 선발대 1만여 명이 진주성 인근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진주성을 공격하지 않고 진주성 외곽에서 성을 지원하던 경상우병사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95

 

[임진왜란53] 진주대첩(3) 일본군을 물리친 모쿠소 호간

10월 9일, 10월 6일부터 시작된 진주성 공방전은 며칠간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우키타 히데이에의 일본군은 진주성 외곽에 있는 의병이 배후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진주성 함락에 매번 실

historicalhistory.tistory.com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토모 요시무네,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다이묘에게 임진년(1592년)과 같이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고 공적을 올리지 못한다면 영지를 몰수할 것이고, 가문을 존속하지 못할 것이라 압박을 가하니 임진왜란 참전 다이묘들은 강한 압박을 받고 어떻게든 진주성을 함락시켜야겠다고 마음먹게 됩니다.

시마즈 요시히로



이렇게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이 확실시되니 강화를 진행하던 심유경은 항의했으나 고니시는 이번 공격이 태합(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고 했으며, 차라리 진주성 방어를 포기하고 성을 비운다면 일본군이 이를 잠시 점령했다가 물러갈 것이라고 답변하였습니다.

 

이번에 진주로 가는 우리 군대가 30만 명이나 되니 아마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편지를 보내 이를 은밀히 알려 진주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 예봉을 피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우리 일본 군대도 성이 텅 비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는 곧 철병하여 동쪽으로 돌아올 것이다.

[선조실록]




다음 시간에 제2차 진주성 전투에 대해 이어서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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