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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63] 행주대첩에서 승리한 이유와 그 여파

by 역사채우기 2022.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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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대첩에서 승리한 이유

3천의 조선군이 3만의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꼽자면 우선, 행주산성을 전장으로 꼽았던 것을 첫 번째로 들 수 있습니다.

행주산성의 외성(토성)(출처 : 문화재청)

 

행주산성은 비록 성벽은 낮았지만, 남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동쪽으로 창릉천이 흘러 북쪽과 서쪽 방면의 방어에 전념할 수 있었고, 조방장 조경이 전투 직전 성의 내성과 외성에 목책을 둘러 방어력을 높였습니다.

행주산성 인근 지도(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두 번째로, 신기전, 변이중의 화차, 이장손의 비격진천뢰, 이순신의 천자총통(전투 막바지에 화살 지원 포함) 등 당대의 신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병력의 열세를 화력으로 극복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변이중의 화차(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세 번째로, 지휘관인 권율이 병사들에게 재주머니를 착용하게 하여 일본군과의 근접전에 대비한 점과 강한 통솔력, 그리고 상황에 맞는 적절한 대처, 마지막으로 관군, 의병, 승병의 높은 충성심을 꼽을 수 있습니다.

권율 영정

 

 

 

| 행주대첩의 의의

한편,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개성을 지나 평양으로 후퇴하던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행주대첩의 소식을 듣고 자신이 급하게 회군한 것을 후회했다고 전해집니다.

 

벽제관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00

 

[임진왜란58] 기세를 타고 한양으로! 벽제관 전투(1)

1593년 1월 9일, 3차례의 탈환 시도 끝에 평양성을 되찾은 조명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1월 10일에는 개성까지 진격합니다. 고구려의 수도에 이어 고려의 수도까지! 한편, 평양성을 지키던 고니시 유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01

 

[임진왜란59] 과도한 자신감, 성급한 진격의 결과! 벽제관 전투(2)

1월 25일, *여석령에서 벌어진 조명연합군의 정탐병이 일본군의 정탐병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전공을 세울 욕심에 자신의 기병만 이끌고 *벽제관으로 진군하였습니다. * 

historicalhistory.tistory.com



그리고 일본군은 행주산성에서 대패한 치욕을 씻기 위해 짐승의 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다시 출정을 계획했으나 결국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권율은 첫 전투인 용인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자신의 군사를 피해없이 수습했고, 그 군대를 바탕으로 이치 전투독산성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거기다 행주산성에서의 대승으로 권율은 명실공히 명장의 반열에 들어섰으며, '육지에서는 권율, 바다에서는 이순신'이라는 말까지 퍼질 정도였습니다.

 


권율은 이 공으로 자헌대부(정2품)로 승진하였고, 명나라 부총병 사대수는 

 

"외국에도 명장이 있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경략 송응창은 

 

"권 포정(권율)은 난리 속에 충신이고 중흥의 명장이라 이를 만하다"

 

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명나라 조정에서는 행주대첩의 소식을 듣고 병부상서 석성이 명나라 황제 만력제에게

 

"권율이 외로운 성을 혼자 지키면서 강경한 적을 막았습니다"

 

라고 보고할 정도로 명나라 역시 행주대첩의 승리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또한, 행주대첩을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김시민의 진주대첩에 이어 임진왜란의 3대 대첩에 포함시켰으니 이 전투가 국난 극복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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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3대 대첩



이렇게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정작 전투에 직접 참전한 권율은 행주대첩보다 그 이전의 이치 전투를 더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치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6

 

[임진왜란24] 이치 전투! 일본군의 전주성 진출을 차단하라

7월 7일에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겨우 웅치(곰티재)를 넘은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는 전주성으로 향했고, 본대는 금산에서 전주로 가는 또 하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7

 

[임진왜란25] 이치 전투의 결과와 영향

이치 전투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승리로 기울어갈 때쯤 종횡무진 활약했던 동복현감 황진이 이마에 총탄을 맞아 후송되었고, 의병장 황박마저 전사하면서 조선군은 동요하기 시

historicalhistory.tistory.com




| 행주대첩의 오해와 진실

행주산성 안에 있던 부녀자들이 입고 있던 치마를 잘라 받침대를 만들어 그 안에 돌을 담아 조선군에게 날라주었고, 이 도움 덕분에 일본군을 막아내면서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행주산성에는 백성들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부녀자도 없었고, 1517년에 최세진이 쓴 [사성통해]에 이미 '행주치마'라는 말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는 지어낸 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음 시간에 웅포 해전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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