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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62] 행주대첩(3) 계속되는 공격과 예상치 못한 변수

by 역사채우기 2022.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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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6진 모리 히데모토의 공격

조선군은 일본군 1진부터 5진까지의 계속된 공격을 잘 방어하였으나 쉴 틈도 없이 6진의 모리 히데모토가 출진하였습니다.

* 1진 : 고니시 유키나가, 2진 : 이시다 미츠나리, 3진 : 구로다 나가마사, 4진 : 우키타 히데이에, 5진 : 깃카와 히로이에

모리 히데모토


모리 히데모토의 일본군은 처영이 이끄는 승병과 육박전을 전개하였는데 조선군은 계속된 전투로 점점 지쳐가는 상태였습니다.

 

반면에, 단병접전에는 도가 튼 일본군이었으나 승병들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재 주머니를 얼굴에 뿌리자 앞을 볼 수가 없었고, 그사이에 목이 달아나 버렸습니다.

승군을 지휘하는 서산대사(참고용 사진입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공격이 지지부진해져 갈수록 피해가 늘어가고, 더 치고 나가지도 못하자 후퇴를 명하였습니다.

 


| 일본군 7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공격

이렇게 조선군은 1진부터 6진까지 모두 물리쳤으나 마지막으로 7진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는 임진왜란의 6군 선봉장이며, 이치 전투에서 권율에게 패한 바 있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였습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조선군은 그동안의 전투로 화살과 돌, 화약까지 거의 소모하였기 때문에 근접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고, 보바야카와의 부대는 그 기회를 틈타 단숨에 목책을 넘어 성 내부로 진입하였습니다.

그렇게 일본군은 조선군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고,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조선군은 또다시 위기를 맞았습니다.

행주대첩 민족기록화(출처 : 독립기념관)



그런데 이때, 충청수사 정걸이 판옥선 2척에 화살 수만 발을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왔습니다.

이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 보냈던 것이었고, 이순신은 행주대첩에서의 숨은 공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조선군은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고, 화살을 쏘는 족족 적군을 명중시키면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가까스로 극복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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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 민족기록화



 

| 기적적인 승리

한편, 일본군은 조선군의 예상치 못한 지원에 당황했으며, 이어서 한강으로 조운선 수십 척이 지나가자 고바야카와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여기까지 온 것이라 착각하게 됩니다.
앞에는 권율, 뒤에는 이순신

멀리서 보이는 조운선을 보고 이순신의 조선 수군으로 착각한 일본군(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당시 이순신의 전공은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까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판옥선과 조운선을 본 고바야카와는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고, 혼비백산하여 퇴각 명령을 내렸습니다.



마침내 일본군이 모두 물러가자 권율은 칼을 높이 빼들어 총공격을 명령하였고, 이 공격으로 적병 130명을 베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행주대첩비(출처 : 문화재청)

 


그리고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피해를 감추기 위해 자국군의 수많은 시체를 불태웠기 때문에 수급을 많이 확보하지는 못했으나 타다 남은 시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2월 12일 묘시(오전 5시~7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유시(오후 5시~7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고, 조선군은 3천의 병력으로 그 열 배에 달하는 3만의 일본군을 물리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뒤 권율은 일본군이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체를 나무에 걸어 놓으면서 적군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고, 2월 16일, 남은 병사들과 도원수 김명원, 순변사 이빈, 명나라 부총병 사대수가 있는 파주산성으로 진을 옮겼습니다.

파주 덕진산성(출처 : 문화재청)




다음 시간에 행주대첩 승리의 원동력과 의의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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