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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65] 조선 수군 최초의 상륙작전! 웅포해전(2)

by 역사채우기 2022.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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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부터 시작된 조선 수군의 4차례의 웅포 공격으로 5척의 적선을 격침시키고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했으나 웅포에는 아직 훨씬 많은 수의 적선과 병력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웅포 인근 지도(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게다가 이순신이 기다리던 조선 육군의 지원이 어렵게 되니 조선 수군이 독자적으로 웅포의 왜성과 포구에서 바다로 나올 생각이 없는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2월 22일, 임진왜란 최초로 상륙작전을 전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선 수군이 보유하고 있던 성응지의 의병과 심혜, 의승이 이끄는 승병 1,700여 명을 동원하여 그중 1,100명을 남양리(안골포)에, 남은 600명을 제포(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각각 상륙시켰고, 경쾌선을 15척씩 조직하여 차례로 웅포로 진격한 후 공격하고 빠지길 반복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3방향에서 적을 포위 공격하여 웅포에 있는 일본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려는 계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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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포해전 상황도(출처 : 경상남도청)



이때 일본군은 조선 수군이 상륙 작전을 감행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 조선 수군의 함대가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을 쉴 새 없이 발사해 수많은 적을 사살하였습니다.

그리고 제포와 남양리에 상륙한 의병과 승병들 역시 활을 쏘고 창을 휘두르며 용감히 싸워 상당수의 일본군을 무찔렀고, 부상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단병전에 강한 일본군을 상대로 전혀 피해가 없는 조선 수군


이렇게 조선 수군은 병력에서 열세이고, 지형까지 불리한 데다가 육군의 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총력을 기울여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으나 공성 무기도 없이 웅포를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전투 도중 일부 조선 수군이 이순신의 명령 없이 들어갔다가 피해를 입은 일이나 적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전선을 보고도 모른 체 하던 일부 경상우수군의 실책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

 

발포 2선, 가리포 2선이 명령도 없이 뛰어들었다가 얕은 곳에서 걸려 적들에게 공격당하고 말았다.
분하고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얼마 뒤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분하고 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 이순신 [난중일기]

 


전투를 치른 후 조선 수군은 소진포(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리)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습니다.

웅포 인근 지도(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이후에도 조선 수군은 2월 28일과 3월 6일에도 웅포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본군은 지난번의 전투로 더욱 소극적으로 나섰으며, 진지에서 조총만 쏘아댈 뿐 이전처럼 포구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기에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공격에서는 산기슭의 진지에 비격진천뢰를 발사하였고, 어느 정도 타격도 입혔으나 웅포를 점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비격진천뢰와 중완구(출처 : 위키백과)



그렇게 3월 10일이 되자 조선 수군은 웅포를 공격한 지 1개월 만에 철수를 결정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1개월간 7차례에 걸친 전투로 적선 51척을 격침시키고, 적병 2,500여 명을 사살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으나 웅포에는 여전히 많은 수의 적군이 산재해 있었으며, 그러는 동안 조선 수군은 피로가 극에 달하고 있었고, 가지고 온 식량과 화약 등의 군수품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개월 간의 전투로 지친 조선 수군(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거기다 기다리고 있던 명나라 지원군은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남하는 고사하고 오히려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퇴각했으며, 농민들의 파종 시기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에 연합함대를 해체하고 전라좌수영으로 귀항하였습니다.

* 당시 전라도는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은 거의 유일한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파종 시기가 늦어진다면 향후 조선군과 백성들이 먹을 식량에 크나큰 타격을 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전라도는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은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였습니다.




다음 시간에 제2차 진주성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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