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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74] 이몽학의 난(2) 홍주목사 홍가신의 활약

by 역사채우기 2022.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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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른 속도로 번져가는 난의 불길

이몽학이 난을 일으켜 홍산과 임천(충남 부여군)을 단숨에 함락시키자 실의에 빠져있던 백성들은 앞다투어 이몽학의 무리에 가담하기 위해 앞다투어 몰려들었습니다.

반란군에 가담하기 위해 구름같이 몰려든 사람들



그들은 7월 7일에 정산현(충남 청양군)에, 8일에는 청양현에 다다랐고, 이들을 막아야 할 정산현감 정대경과 청양현감 윤승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모두 도망가니 두 고을은 모두 반란군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반란군은 기세를 이어 9일에는 대흥군(충남 예산군)을 공격했는데 대흥군수 이질수 역시 산중으로 도망가면서 대흥군 역시 손쉽게 함락되었고, 반란군의 위세는 날로 커져만 갔습니다.

이처럼 관군들은 반란군에 전혀 대항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부여현감 허수겸과 서산군수 이충길은 쳐들어 온 반란군을 도와주기까지 하는 한심한 작태를 보여주었습니다.


 

| 홍주목사 홍가신의 활약

같은 날, 이몽학의 반란군은 홍주(충남 홍성군)에 다다르자 홍주목사 홍가신은 수성 준비를 할 시간을 벌기 위해 관속 이희수를 보내 거짓으로 투항하는 한편, 외부에 구원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 인근의 군사들을 홍주성에 집결시키도록 하였습니다.

홍주읍성



7월 10일, 이몽학은 홍가신이 거짓 투항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고, 홍주성에서 3리 쯤 떨어진 곳에 5개의 진을 친 후 곧이어 한현의 군대가 올 것이니 속히 항복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홍가신은 항복할 마음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화포와 불화살을 쏘며 강하게 대항하였습니다.

홍가신



그러자 이몽학은 홍주성 함락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7월 11일 새벽에 몰래 빠져나갔으나 시간은 이미 많이 지체되어 충청병사 이시언이 온양에서, 어사 이시발이 유구역에서, 중군 이간이 청양에서 각각 홍주로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으며, 충청수사 최호의 군대는 이미 홍주성에 입성하고 난 뒤였습니다.

 

 


| 자중지란에 빠진 반란군

이렇게 전세가 반란군에게 급격하게 불리해지자 반란군 내에서는 도망치는 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고, 반란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전주 아병(대장을 수행하던 병사) 윤성이 다음과 같이 고하였습니다.

 

"도원수(권율)와 전라 감사, 그리고 충용장군(김덕령)이 각각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이곳에 이르렀으니 내일이면 마땅히 무찔러 죽일 것이다.
너희들 중에는 협박을 받아서 따라 온 자가 많을 것이니 만약 괴수를 목 베어 와서 항복한다면 큰 상을 내릴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반란군의 진영은 급속히 붕괴되었고, 반란군은 앞다투어 항복을 청했으며, 이몽학은 결국 부하였던 김경창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몽학(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중에서)



이때 이몽학과 같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모속관 한현은 반란군 수천 명을 이끌고 있었으나 이몽학이 난을 일으킨 후의 상황을 주시하다가 홍가신의 군대에 의해 패주하다가 포로로 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결국 이몽학의 난은 가담한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될 정도로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해 나갔으나 난을 일으킨 지 일주일도 못 되어 반란은 모두 진압되었습니다.

이처럼 난은 빠르게 진압되었으나 조정에서는 모속관 한현을 비롯하여 반란을 주도한 자들을 한양으로 압송하여 선조가 직접 국문을 하였고, 난을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와준 자들을 실토하게 하였는데 그들의 입에서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의 명단이 튀어 나왔습니다.

왕이 죄인들을 직접 국문하는 장면




다음 시간에 이몽학의 난의 여파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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