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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75] 이몽학의 난(3) 반란은 진압하였으나 여파는 너무도 컸다

by 역사채우기 2022.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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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몽학의 난의 진압

1596년 7월 6일에 '왜적의 재침을 막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은 홍산현, 임천현, 정산현, 청양현, 대흥군을 빠르게 점령하면서 나날이 세력을 불리고 있었으나 홍주목사 홍가신의 활약으로 홍주성 함락에 실패하였고, 관군의 토벌군이 잇따라 도착하면서 반란군의 숨통을 조여왔습니다.

홍주읍성

 


거기다 이몽학을 베는 자에게 상을 내릴 것이라는 말이 전해지자 반란군은 급속히 붕괴되었고, 이몽학은 부하였던 김경창에게 목이 잘리면서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습니다.

이몽학(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중에서)



그러나 조정에서 충청도 일대로 파견된 관리들은 자신을 도사, 선전관이라 지칭하며 이몽학의 난에 가담한 자들을 붙잡으러 왔다며 죄없는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거나 처형을 일삼는 일도 있었습니다.

 

역변이 일어난 뒤 어떤 벼슬아치는 갑사ㆍ병마절도사ㆍ수군절도사ㆍ군관이라고 일컫고는 도둑을 잡는다는 핑계로 마을에 들어가 장정을 묶어갔습니다.
노인과 어린이들은 모두 산속으로 도망쳤습니다.

집안에 잡물이라도 있으면 도둑의 장물이라며 깡그리 쓸어갔습니다.
그래서 마을이 텅텅 비었습니다.

- [선조실록]

 

 


| 반란은 잠재웠으나 여파는 컸으니...

이후 난을 일으킨 주동자들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선조가 그들을 직접 국문하여 반란군의 배후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모속관 한현은 충용장군 김덕령, 최담령, 홍계남, 최강, 한음 이덕형이 반란에 공모하였으며, 홍의장군 곽재우, 고언백 등이 자신의 심복이라 말하였습니다.

 

* 모속관 : 군량미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아 파견된 관리

 


그 말을 듣고 선조는 위에 언급된 자들을 모두 체포하도록 지시하였고, 그들을 심문하였으나 혐의가 없음이 밝혀지자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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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하는 장면



그러나 충용장군 김덕령만은 예외였습니다.

 


김덕령은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진군 중이었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난이 진압되어 돌아가려던 때에 반란군 주모자들의 입을 통해 거론되어 체포되었으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반란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김덕령(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그렇지만 심문은 계속되었고 26일 동안 6번 심문을 받았고 모진 고문을 받아 정강이뼈가 부러져 무릎으로 걸어갈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김덕령은 혐의가 없음을 밝히며 꿋꿋이 버텨내었으나 선조가

 

"덕령은 형장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니 참으로 적이다."

 

하여 그의 용력을 의심하였고, 끝내 풀어주지 않으니 충용장군 김덕령은 마침내 형장 아래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김덕령의 친필(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김덕령은 활동한 시기가 휴전 기간이었기 때문에 활약할 기회가 없었지만 백성들은 그의 무력을 높이 사며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혐의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여겼고, 이후에 의병장들도 나라에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나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이 연이어 터지면서 선조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조선에서 가장 많은 병력과 최정예 수군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왕인 자신보다 백성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 대한 경계와 의심 역시 깊어만 갔습니다.

선조(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송유진의 난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12

 

[임진왜란70] 논개의 희생과 송유진의 난

| 진주성 함락 이후 한편, 진주성 함락 이후 진주목사 서예원은 비참한 죽임을 당했고, 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습니다. 일본군은 진주대첩 때 김시민이 전사하지 않았고, 제2차 진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온나라 사람들이 그(김덕령)를 의지하여 안심하였고, 왜놈도 또한 그를 겁내어 항상 스스로 계엄하여 경계를 지키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는데, 국운이 불행하여 죄가 아닌데도 그를 죽였도다.

하늘이 그에게 수년의 수명을 더 주었더라면 임진왜란이 일어나 어찌 전라ㆍ충청도에 쳐들어 올 수 있었으랴.
당시에 뜻 있는 이는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후에 왜적이 그가 죽은 것을 자세히 알고는 모든 적추들이 술을 마시며 서로 축하하고 날뛰며, 기운을 내기를, "전라ㆍ충청도에는 걱정이 없다."하였다.

난중잡록 [대동야승]

 

 

남도의 군민들은 항상 그(김덕령)에게 기대고 그를 소중하게 여겼는데 억울하게 죽게 되자 소문을 들은 자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가슴 아파하였다.
그때부터 남쪽 사민들은 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최담령은 덕령과 함께 용력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이 뒤로부터는 어리석은 겁보인 체하여 스스로 폐인 노릇을 하였다.

덕령의 매부 이인경도 담략과 용기가 있고 술수를 알았는데 무과를 거쳐 왜적 토벌에 공을 세웠지만 덕령이 화를 입게 되자 이를 경계하여 벼승리 변강 군수에 이르렀을 때 즉시 병을 칭탁하여 사임하고는 생을 마칠 때까지 감히 큰 장령이 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운둔한 채 쓰여지지 않음으로써 수명대로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선조수정실록]



이후 1604년, 조선 조정은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자들을 청난공신으로 책록하여 1등을 홍가신, 2등을 박명현, 최호, 3등에 신경행, 임득의를 임명하였습니다.

청난공신 1등 홍가신의 교서(출처 : 문화재청)




다음 시간에는 강화 회담의 결렬과 이순신의 파직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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