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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76] 강화 회담의 결렬과 이순신의 파직

by 역사채우기 2022.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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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에 발발했던 임진왜란은 벌써 여러 해를 넘겨 1597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는 계속 진행 중이었고, 그러는 동안 일본군은 남해안 연안 곳곳에 왜성을 쌓아 혹시라도 진군해올지 모르는 조선 수군을 방비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회담 장면

 


그래서 이순신은 지난 임진년 때처럼 여러 차례 일본군을 공격하러 나서기 어려웠고, 일본군 역시 조선 수군과 싸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은 서로 대치한 채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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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의 전함(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 강화 회담의 결렬

그러던 중 명나라 경락 송응창은 강화의 조건으로 크게 3가지를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일본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
두 번째는 국경인이 넘겨준 조선의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송환할 것
세 번째는 전쟁의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을 사죄할 것

 


이에 맞서 일본에서는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삼을 것과 조선 8도 중 4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or 강원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낼 것 등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양측은 모두 서로의 조건을 들어줄 수 없었기 때문에 강화는 결렬되었고, 명나라의 강화 책임자였던 유격장군 심유경은 일본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명나라 부총병관 양원에게 붙잡혀 황제와 조정을 기만한 죄로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심유경(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 요시라의 간계와 이순신의 파직

1597년 1월 11일, 고니시 유키나가는 참모였던 요시라를 통해

 

'가토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때를 맞춰 요격한다면 전란의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정보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전했습니다.

요시라(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고니시가 이런 정보를 흘린 이유는 전국시대 부터 가토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군의 손을 빌려 가토를 잡으려 했다는 설이 있고, 반대로 이중간첩 요시라가 이순신을 곤경에 빠뜨려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려는 속셈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자 김응서는 도원수 권율과 조정에 이 사실을 알렸고, 1월 13일에 이순신에게 가토를 잡아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1월 10일에 가토가 이미 부산에 상륙했음을 알고 있었고, 적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며 신중을 기했으나 상관이었던 도원수와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니 위험한 걸 알면서도 부산포 공격을 위해 출정에 나섰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그러는 와중에 1월 22일, 원균은 자신이 수군을 이끌었다면 가토의 상륙을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장계를 올려 선조의 마음을 움직였고, 장계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임진왜란 직전에 고니시가 상륙하기 전에 원균이 요격했다면 임진왜란은 없었을 텐데

원균

 

신이 중요한 임무를 위임받아 남번을 지키고 있으면서 노둔하나마 힘을 다하여 만세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습니다.
여러 고을에 신칙하여 구마를 정제하여 신이 사졸에 앞장서서 일거에 섬멸하려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수백 명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 뒤에 주둔하면서 경선을 가려 뽑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절영도 밖에서 무위를 떨치고, 1백여 명이나 2백 명씩 대해에서 위세를 떨치면, 청정(가토 기요마사)은 평소 수전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으로 생각됩니다.

원하건대 조정에서 수군으로써 바다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이제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서 우러러 아룁니다.

[선조실록] 전라병사 원균의 장계 중 일부

 


결국, 선조는 거듭된 반란으로 의심병이 생겨 죄 없는 의병장 이산겸과 김덕령을 각각 처형했으며, 이순신에 대한 경계도 높아진 상황에서 이번 일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서 쫓아내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산겸의 처형에 대해서는 송유진의 난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12

 

[임진왜란70] 논개의 희생과 송유진의 난

| 진주성 함락 이후 한편, 진주성 함락 이후 진주목사 서예원은 비참한 죽임을 당했고, 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습니다. 일본군은 진주대첩 때 김시민이 전사하지 않았고, 제2차 진

historicalhistory.tistory.com

 

 

김덕령의 처형에 대해서는 이몽학의 난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17

 

[임진왜란75] 이몽학의 난(3) 반란은 진압하였으나 여파는 너무도 컸다

| 이몽학의 난의 진압 1596년 7월 6일에 '왜적의 재침을 막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은 홍산현, 임천현, 정산현, 청양현, 대흥군을 빠르게 점령하면서 나날이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어 적을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 무함하기까지 하며,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함이 없는 죄이다.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율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

[선조실록] 中 선조가 이순신을 처벌하려 하는 대목



2월 4일, 사헌부는 이순신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조의 눈치를 보며 이순신을 탄핵했고, 2월 6일, 선조는 이순신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시키고 도성으로 압송해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순신을 잡아 올 때에 선전관에게 표신과 밀부를 주어 보내 잡아오도록 하고,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 보내라
또 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여 있다면 잡아오기에 온당치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올 것도 말해 보내라

[선조실록]

 

 

 

다음 시간에 이순신2번째 백의종군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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