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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79] 기문포 해전의 전말과 원균의 실상

by 역사채우기 2022.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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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문포 해전의 전말

3월 9일에 벌어진 기문포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했으나 아군의 피해는 이보다 더 큰 14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개전 이래 처음으로 판옥선 1척격침되었습니다.

아군의 손에 의해 격침된 판옥선(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원균이 이 해전의 장계를 보내자 비변사는 전투 경과를 조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균의 비열한 행동이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참모 요시라 사이에서 일본군이 거제도 일대에서 나무를 해도 된다는 약조가 체결된 상태였고, 지난 해전에서 죽인 일본군이 그들이었던 것입니다.

요시라(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아래는 비변사와 선조의 대화입니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원균이 바친 수급이 만약 나무를 베러 왕래하는 왜라면 쳐들어와서 사람을 죽인 왜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장을 독려하여 역전, 참획한 그의 공이 참으로 가상하니 논상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으나, 중대한 일인 은명은 신하가 경솔히 의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조가 답하기를,
"나무를 베러 다니는 왜가 없지 않을 것이나 이 또한 이다.
분군기를 보건대 분명 나무를 베러 다니는 왜는 아니었으니 보통 왜가 아닌 듯하다.
원균은 가자하거나 은냥을 내려야 마땅하겠으나, 다만 반드시 병기를 조사하는 것은 깊은 뜻이 있으니 우선 병기를 바치기를 기다려 참작하여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다.

[선조실록]

 

선조(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얼마 후 김해 죽도에 주둔 중이던 도요 시게모리가 나무를 구하기 위해 부하를 보냈는데 이들이 모두 죽어서 돌아오니 조선군에게 항의하는 서한이 날아왔고, 이 때문에 일본군 내에서 전쟁을 불사하는 무리들은 약조를 체결한 요시라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선조는 원균에게 포상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 부산포를 공격할 수 없다는 원균

그리고 원균은 부산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는데 상황을 보니 이전에 이순신이 주저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부산으로 가는 연안 곳곳에는 왜성이 산재해있고, 병력은 부족했으며, 육군의 지원 또한 받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웅천왜성(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할 때는 자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면 곧장 부산포를 공격하겠다고 장계를 올린 일이 있었으나 부산포를 공격하지 않는 것에 대해 선조의 문책을 받자 이제 와서 30만 육군안골포가덕도를 먼저 공격한다면 수군이 부산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장계를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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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과 안골포, 가덕도의 위치(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우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우리나라 군병이 그 수가 매우 많아서 노쇠한 자를 제하고 정병을 추리더라도 30여 만(!)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늦봄인데다 날씨가 가물어서 땅이 단단하니 말을 달리며 작전을 할 때는 바로 이때입니다.

반드시 4∼5월 사이에 수륙 양군을 대대적으로 출동시켜 한 번 승부를 겨루어야 합니다.
때를 타고 함께 공격하여 남김없이 섬멸한다면 일분의 수치나마 씻을 수가 있겠습니다.
조정에서 속히 선처하소서.

[선조실록]

 

 


| 원균의 실상

그러면서 원균은 전투 준비에는 힘을 쏟지 않고 이순신이 만든 군사 회의실인 운주당에 울타리를 쳐놓아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게 하고, 그 안에서 첩과 함께 술을 마시는 추태를 보였습니다.

운주당

 

이순신이 한산도에 머무르고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지었다.
그는 그곳에서 장수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를 연구하면서 지냈는데, 아무리 졸병이라 해도 군사에 관한 내용이라면 언제든지 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했다.
그러자 모든 병사가 군사에 정통하게 되었으며,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는 장수들과 의논해 계책을 결정한 까닭에 싸움에서 패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원균은 그 집에 첩을 데려다가 함께 살면서 이중 울타리를 쳐 놓아 장수들조차 그를 보기 힘들었다.
또한 술을 좋아해서 술주정이 다반사였다.

군중에서는 형벌이 무시로 이루어져 병사들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왜놈들을 만나면 달아나는 수밖에 없네그려."
장수들 또한 그를 비웃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아 지휘관으로서의 품위나 명령이 지켜지질 않았다.

- 류성룡 [징비록]

 

충청 우후 원유남이 한산도에서 왔는데 원균이 못된 짓을 많이 한다고 했다.
또 진중의 장졸들이 다 그를 따르지 않으므로 앞일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 이순신 [난중일기]

 


원균의 실상이 이와 같으니 조선 수군의 앞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자기 꾀에 걸려든 원균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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