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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83] 칠천량 해전의 결과와 원균의 생존 여부

by 역사채우기 2022.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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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천량해전의 결과와 그 여파

7월 15일의 칠천량해전과 경남 고성 춘원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살아남은 배를 버리고 도망친 결과, 조선 수군은 주력 전함인 판옥선 60~70척이 격침되었고, 일본군에게 공포 그 자체였던 거북선 또한 3척이 격침되었습니다.

* 춘원포 : 통영시 광도면 황리 또는 통영시 용남면 춘원포로 추정

 

칠천량해전 전투 장면(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당시 삼도수군이 거느린 판옥선의 숫자가 1백 척이 넘었었고, 위의 전투로 많은 전선이 격침되었으나 경상우수사 배설을 중심으로 원균의 명령을 거부하고 한산도 방면으로 제각기 후퇴한 잔여 전선들은 격침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순신과 함께 여러 해전에서 활약했던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전사하였고, 사도첨사 김완은 포로로 붙잡혔으며, 최대 1만에 이르는 조선 수군이 전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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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도



게다가 일본군은 춘원포에서 조선 수군의 주력을 제압한 뒤 서진하여 한산도 통제영으로 무혈입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산도 제승당

 

 

자칫 잘못하면 일본군이 한산도에 보관 중이던 군수물자를 손에 넣을 수도 있었으나 경상우수사 배설12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먼저 한산도에 도착하여 그곳에 보관되어있던 수많은 군수물자를 모두 태워버리고 인근의 백성들까지 피난시킨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청야전술)


한편, 일본군은 칠천량해전의 승리로 이순신에게 빼앗겼던 제해권을 되찾고 서해와 전라도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한 데 이어 앞선 해전에서 가토 요시아키가 부상당한 것을 빼면 피해가 미미했던 것을 보면 일본군 입장에서는 상상도 못 할 전과를 거둔 것이었습니다.

조선 조정과 조선 수군 그리고 일본 수군 중 아무도 무능한 지휘관 한 사람의 실책으로 최강의 전력을 지닌 조선 수군이 이렇게 참담한 패배를 겪고 붕괴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칠천량해전 패배의 보고를 접한 사람들의 반응

한편, 조선 조정은 (경남)고성 춘원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 선전관 김식에게서 칠천량의 참패로 그간 믿었던 조선 수군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나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조선 조정(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그리고 그들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수군이 승리한 것은 이순신이 대단했기 때문이었고, 이번 해전의 패배는 원균이 무능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선조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아래는 칠천량해전의 보고를 받은 직후 선조의 반응과 사관의 논평입니다. 

(칠천량해전의 패배를 보고 받은 후) 상(선조)이 이르기를, 이 일은 어찌 사람의 지혜만 잘못이겠는가. 천명이니 어찌하겠는가.
"원균 한 사람에게만 핑계대지 말라" 하였다.

사관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칠천량해전)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사람을 찢어죽이는 형벌)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들은 모두 죄가 없다.
원균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원균은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니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데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사관의 팩트폭격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칠천량해전은 워낙 여파가 컸기 때문에 훗날 영조 시기에 암행어사로 이름을 떨쳤던 박문수도 이에 대해 논평을 한 일이 있습니다.

 

박문수 초상화(출처 : 문화재청)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중 박문수가 이순신과 원균을 평가한 대목 

 

 

마지막으로 천민과 비슷한 대우를 받던 수군을 지난 6년간 밤낮을 아끼지 않고 훈련시켜 아시아 최강의 군대로 만든 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칠천량에서의 참패 소식을 듣고 그 누구보다도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이며, 이는 [난중일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7월 18일. 정미,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길
"16일 새벽에 수군이 대패했습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와 뭇 장수들이 다수 살해당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

[난중일기]

 

 


| 원균은 과연 전사했는가?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원균춘원포에서 전사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당시의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원균이 전사하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칠천량해전도 및 춘원포의 위치

 

신(선전관 김식)은 통제사 원균 및 순천부사 우치적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전관 김식의 보고

 

원균은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했으나 몸이 비대하여 소나무 밑에 주저앉고 말았다.
수행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였던 그는 왜적에게 죽었다고도 하고 도망쳐 죽음을 모면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

- 류성룡의 [징비록]

 


또한, 도원수 권율의 군관인 최영길은 원균을 직접 만나 대화를 한 기록이 있어 원균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의문을 품게 합니다.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아뢰기를 "신의 군관인 최영길이 한산도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균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말하기를 사량도(경남 통영)에 도착한 대선 18척과 전라선 20척은 본도에 산재해 있고 한산도에 머물러 있던 군민·남녀·군기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이에 조선 조정은 원균에게 칠천량해전의 책임을 물어 처단하여야 한다고 했으나 선조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원균은 춘원포에서 도망친 뒤 숨어 살다가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의 지시로 선무 1등 공신으로 책록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조선 수군을 2번이나 말아먹은 최악의 지휘관이 선무 1등 공신?

 

원균의 묘(가묘)(출처 : 문화재청)



여기서 선조가 원균을 찾아내 처단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선조 자신과 원균의 행적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선조가 원균을 처단할 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원균은 임진왜란 초반, 경상우수영 전함을 전투 한번 없이 자침시켰고, 선조는 한양 도성을 내어주고 의주까지 도망친 전과가 있습니다.
둘째로, 원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했고, 선조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으며, 셋째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쫓아내고 원균을 후임 통제사로 임명한 사람이 선조였고, 원균 역시 이순신을 모함하여 끌어내리는 데에 기여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에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통제사 복직과 조선 수군의 재건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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