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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85]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

by 역사채우기 2022.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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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수군 재건에 박차를 가하던 중 8월 3일, *선전관이 선조의 명을 받고 이순신이 머물고 있던 진주에 내려왔습니다.

* 선전관 : 왕의 측근에서 왕명 출납과 군무 처리 등을 맡던 무반직

 


이순신을 전과 같이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고, 권준을 충청수사에 임명한다는 교서를 내린 것이었습니다.
잘 싸울 때 끌어내릴 때는 언제고 수군이 박살 나니까 인제 와서 다시 싸우라 하는 선조

진주 손경례 가옥(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장소)

 


[이충무공전서]에는 교서의 내용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아! 나라가 의지하여 보장으로 생각해 온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고 다시 흉한 칼날이 번득이게 함으로써 마침내 우리 대군이 한 차례의 싸움(칠천량해전)에서 모두 없어졌으니, 이후 조선의 바다를 그 누가 막아낼 수 있겠는가.
초미의 위급함이 조석으로 닥쳐온 상황에서, 지금 당장 세워야 할 대책은 흩어져 도망간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배들을 거두어 모아 급히 요해처에 튼튼한 큰 진영을 세우는 길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망갔던 무리가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한창 덤벼들던 적들 또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생각건대,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로 임명되던 그날부터 크게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의 큰 승첩이 있고 난 뒤부터 크게 떨쳐 변방의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어왔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교체시키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이고 백의종군 하도록 한 것은 역시 나의 모책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그 결과 오늘 이같은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이제 그대를 상복 중에 기용하고(모친상) 또 그대를 백의(백의종군) 가운데서 뽑아내어 다시 전과 같이 충청ㆍ전라ㆍ경상의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바이니, 그대는 부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어루만져 주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내어 단결시켜 수군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형세를 장악하여 군대의 위풍을 다시 한번 떨치게 한다면 이미 흩어졌던 민심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며, 적들 또한 우리 편이 방비하고 있음을 듣고 감히 방자하게 두 번 다시 들고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힘쓸지어다.

그대는 충의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나라를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바라면서, 이에 교서를 내리는 것이니 생각하여 잘 알지어다.

[이충무공전서] 중 선조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교서

 


이순신의 이름 석 자, 조선 수군의 위용만 보고도 일본군을 벌벌 떨게 했던 이순신을 전장에서 끌어내어 백의종군하게 하였으며, 그 소식을 듣고 걱정하던 이순신의 어머니가 노구를 이끌고 아들(이순신)을 만나기 위해 무리하게 배를 타다 숨을 거두었고, 피땀 흘려 키운 함대와 수군을 궤멸시킨 것도 선조에게 일정 부분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선조는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라고 말하며 왕으로서는 신하에게 매우 저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조(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거기다 나라의 명운이 한 치 앞에 놓인 상황에서 이순신을 제외하고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할 적임자가 없었지만, 유교 사회 특성상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모친상의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순신은 부임하지 않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는 마음 하나만으로 이 교서를 받들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습니다.

기복수직교서(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출처 : 문화재청)

 


하지만 이때는 칠천량에서 뿔뿔이 흩어진 채 자신의 전선을 이순신에게 인계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순신배 한 척 없는 이름뿐인 수군통제사였고, 이런 상황에서도 선조는 이순신의 계급을 백의종군 이전의 정2품 정헌대부가 아닌 정3품 절충장군의 품계를 내렸습니다.

정3품은 전사한 이억기를 대신해 새로 임명된 전라우수사 김억추와 경상우수사 배설의 품계와 같았기 때문에 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이 이들을 지휘하는데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었으므로 칠천량해전 이후 전황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 상황에서도 선조는 나라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왕권을 더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순신은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위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처사를 뒤로하고 구례, 순천, 보성을 지나면서 패잔병과 군수품을 수습하였고, 이때 일본군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가는 길목에 손을 뻗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이 거느린 조선 수군과의 거리는 불과 하루 이틀 차이였는데 이순신은 일본군이 이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일본군 역시 가까운 곳에 이순신이 있다는 것을 몰랐으니 이 일은 천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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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수군 재건로(드라마 불멸의이순신 중에서)

 

 

그리고 8월 18일, 회령포(전남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의 전선 12척을 인계받아 그나마 전선을 거느릴 수 있게 되었으나, 이는 임진왜란 이전에 전라좌수영의 판옥선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11척이나 작은 규모였습니다.


이후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판옥선 1척을 이끌고 합류하면서 이순신은 판옥선 13척과 초탐선 32척의 전선을 보유하게 되었지만, 일본 수군이 1천 척이 넘는 전선을 보유한 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판옥선(영화 명량 중에서)



다만, 일본군이 칠천량의 승리에 도취되어 남해 바다의 제해권을 빠르게 장악하지 않고 노략질을 일삼고 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만약, 일본군이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뒤 이순신이 수군을 재건하기도 전에 서해로 진출했다면 조선의 명운은 그대로 끝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무렵, 남원성에서는 조명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다음 시간에 남원성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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