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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82] 칠천량해전(2) 희망을 절망으로 바꾼 원균의 결단

by 역사채우기 2022.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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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은 희망이 있다, 그렇지만 원균 휘하에서는 절망뿐이었다.

지난 전투에서 보여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무능한 행보로 많은 군사와 함대를 잃은 조선 수군은 매우 위축되었고, 지친 상태에 있었습니다.

 

지친 조선 수군(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이런 상황에서 원균은 칠천량에 함대를 정박시키고는 인근에 척후선을 보내거나 경계병을 세우지도 않고 술에 찌들어있을 뿐이었습니다.

* 칠천량 : 경남 거제시 하청면 실전리와 하청면 어온리 사이의 해협

칠천량의 위치(출처 : ko.wikipedia.org)

 

 

그날 밤, 적선 2척이 아군 진영에 다가와 포를 쏘자 조선군 진영은 화들짝 놀라 혼란에 빠졌고, 제각기 도망치기에만 급급한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7월 16일 5경(새벽 3시~5시)에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포를 쏘아 한밤을 놀라게 했다.
우리 수군은 이미 어찌할 수 없이 매우 급하게 되어 배를 멈추니 날랜 자들은 온천으로 나아가고 둔한 자는 미처 나가지 못해 적에게 포위되었다.

이때 여러 장수는 원균을 따라 먼바다로 도망가버려 나(김완)는 홀로 뒷배에서 호위하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재촉하였다.
나는 휘하 군사들과 함께 일제히 대포를 쏘면서 사살하고 죽을 각오로 있는 힘을 다해 싸워 서로 간에 많이 죽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어느새 적선 2척이 이미 50보 이내로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 위태하고 두려운 시점이었다.
이에 주장(원균)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원균은 술에 취해 높이 누워 호령만 할 뿐이었다.

16일 오전 8시경, 조선 함대가 양 갈래로 나뉘었고 한쪽은 진해으로, 한쪽은 거제도 해안을 타고 서남쪽으로 한산도를 향했다.

- 김완의 [해소실기]

 


위의 사료에 기록된 것처럼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아군이 적의 기습을 받아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술에 취한 채 일개 병졸만도 못한 추태를 보이고 있었고, 그러는 동안 조방장 김완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배설, 그리고 충청수사 최호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으나 전황을 반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칠천량해전 모형도(출처 : 한국문화관광연구원)

 


결국, 김완은 적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고, 이억기와 최호는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을 무너뜨렸던 것은 도도 다카토라 휘하의 50~60여 척뿐이었고,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시마즈 요시히로를 비롯한 1천여 척의 함대는 전투가 끝날 때쯤 도망가는 조선 수군을 추격하는 역할을 수행한 정도에 그쳤습니다.

칠천량해전의 일등공신 도도 다카토라




그랬기에 조선 수군은 궤멸적인 피해를 면할 수 있었고, 다음 날에 살아남은 전선들이 양 갈래로 나뉘어 원균을 위시한 주력 함대가 진해만으로, 경상우수사 배설 등의 나머지 함대가 거제도 해안을 따라 한산도를 향했습니다. 

 


| 사지로 들어가는 조선 수군

원균은 고성현 *춘원포에 도착한 후 배를 모두 버리고 육지로 도망치자는 결정을 내렸고, 이 과정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칠천량에서 살아남은 잔여 전선마저도 모두 격침되고 말았습니다.


임진왜란 초반에 원균이 최소 70척, 최대 100척에 이르는 조선 최대의 함대를 전투 한번 없이 자침시킨 일이 떠오르는 건 데자뷰일까요?

* 춘원포 : 통영시 광도면 황리 또는 통영시 용남면 춘원포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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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도

 

 


그래도 이때는 한산도가 적의 손에 떨어지기 전이었으므로 원균이 춘원포가 아닌 한산도로 들어가 견내량을 틀어막았다면 칠천량에서의 피해는 있었을지언정 전력은 어느 정도 보존되었을 것이고, 일본군이 서해와 전라도로 진출하는 데에도 상당한 제약에 놓였을 것입니다. 

결국, 원균의 이 같은 결정이 모든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고, 조선의 명운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어 버렸습니다.

만악의 근원 원균



이후, 춘원포로 도망친 조선 수군의 운명은 참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우리의 주사(원균)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춘원포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신(선전관 김식)은 순천부사 우치적과 간신히 탈출하였습니다.
경상우수사 배설과 일부 장수들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전관 김식의 보고

 


이때 원균의 동생 원전은 원균 휘하의 종사관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형과는 달리 육지로 도망치지 않고 배 안에서 끝까지 남아서 싸우다 전사했다고 합니다.



다음 시간에 칠천량해전의 결과와 여파, 그리고 원균의 생존 여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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