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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구려의 역사

머슴에서 왕이 된 남자 미천왕

by 역사채우기 2021.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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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9KHjh_dBVU

 

 

이번 시간에는 한사군을 몰아내고 고구려를 중흥시킨 미천왕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고구려 15대 왕인 미천왕의 이름은 을불이고 13대 왕인 서천왕의 손자이며, 고추가 돌고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미천왕(드라마 근초고왕 중에서)

 


하지만 14대 왕이었던 봉상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친족인 안국군 달가와 미천왕의 아버지인 돌고에게 반역 혐의를 씌워 처형하자 을불은 신변에 위협을 받고 도주하였습니다.

 

 

 

| 을불, 왕족에서 머슴으로 전락하다

을불은 도망치는 데 성공하여 다다른 곳이 수실촌이었고, 그곳에서 신분을 숨긴 채 '음모'라는 사람의 집에 머슴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음모는 을불의 신분을 알지 못했기에 을불에게 낮에는 나무를 해오도록 하고, 밤에는 집 주변에 있는 연못에서 개구리가 우는 소리 때문에 수면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연못에 기와 조각이나 돌을 던지게 하였습니다.

낮에 나무하고 밤에 돌 던지는 을불

 

 

을불은 견디다 못해 1년 만에 음모를 떠났고, 동촌 사람 재모와 함께 소금 장수 일을 했습니다.


을불은 장사를 마치고 사수촌에서 숙박을 하였는데 그 집의 주인인 노파는 을불이 숙박비로 한 말의 소금을 주었는데도 더 많은 소금을 요구하자 거절당한 것에 앙심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노파는 을불의 소금 가마니에 자신의 신발을 몰래 넣어둔 후 을불이 떠나자 쫓아가서 숨겼던 신발을 찾고는 을불이 자신의 신발을 숨겼다고 관리에게 고발하였습니다.


관리는 노파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신발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노파에게 주고, 을불의 볼기를 때린 후 풀어주었습니다.

 


이리하여 을불은 얼굴이 여위고 복장이 남루하게 되어, 사람들이 그를 보고도 왕손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 머슴에서 왕으로

이 무렵 국상 지위에 있던 창조리봉상왕이 날이 갈수록 폭정이 심해지자 왕을 폐위하고 새 왕을 옹립하기 위해 북부의 조불과 동부의 소우 등을 보내 을불을 찾아오게 하였습니다.

조불과 소우(드라마 근초고왕 중에서)

 


그들이 비류하 기슭에 이르렀을 때 형색은 여위고 핏기가 없으나 행동거지가 예사롭지 않은 사람을 발견했고,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라 생각하고, 나아가 절을 하며 말했습니다.

 

“지금 국왕(봉상왕)이 무도하여 국상(창조리)이 여러 신하와 함께 임금을 폐위하려고 몰래 계획하고 있습니다.
국상은 왕손께서 행실이 검소하고 인자하여 사람들을 사랑하므로 선왕의 업을 이을 수 있다 하여, 일부러 저희를 보내 받들어 맞아오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을불은 자신을 잡아온 것으로 의심하여 말했습니다.
“나는 야인이요, 왕손이 아닙니다. 다시 살펴보시오.”

 

그러자 소우 등이 말했습니다.

 

“지금 임금(봉상왕)은 인심을 잃은 지 오래되어 진실로 나라의 주인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이로 인해 여러 신하가 왕손을 간절하게 바라니,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을불은 그들의 요청을 따랐고,
300년 9월, 임금이 사냥을 떠날 때 창조리가 동반하면서 여러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나와 같은 마음인 자는 내가 하는 대로 하라.”

 

창조리가 갈댓잎을 관에 꽂자, 여러 사람도 모두 갈댓잎을 꽂았다.


창조리는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알고, 그들과 함께 거사를 일으킨 후 왕을 폐위하여 별실에 가두고 병사들로 주변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왕손(을불)을 맞아 옥새와 인끈을 바쳐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머슴 생활부터 갖은 고생 끝에 왕이 된 미천왕의 즉위 순간이었습니다.

왕의 도장 옥새

 


한편, 별실에 있던 봉상왕은 자기 아들들과 함께 자살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 한사군 공격

2년 후, 302년 당시 중국은 사마염의 진나라(서진)가 삼국시대를 통일한 후 팔왕의 난(황후 가남풍이 전횡을 일삼자 8명의 왕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과 영가의 난(흉노, 선비, 갈족, 저족, 강족이 서진을 공격한 사건)이 연이어 터져 혼란스러운 상황에 있었고, 미천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사군 공격에 나섰습니다.

 

* 한사군 :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땅을 통치하기 위해 세운 군현으로 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이 있었다

 

280년의 서진 지도(출처 : 위키백과)

 

 

우선, 3만의 병력으로 현도군을 공격해 8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고, 311년에는 요동의 서안평(평안북도 의주에서 압록강 맞은편 지역)을 점령하여 요동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였으며, 313년에는 낙랑군을 점령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고, 314년에는 대방군을 점령하여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설치되었던 한사군을 400여 년 만에 한반도에서 축출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 한사군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습니다.

 

 

 

| 모용선비 공격

시간이 흘러 319년, 고구려의 서북쪽에 있던 모용선비의 세력이 강해지자 진나라의 평주자사인 최비우문선비, 단선비, 고구려와 연합하여 모용선비를 분할 점령하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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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선비를 포위공격하는 우문선비, 단선비, 고구려

 


작전은 실행에 옮겨져 연합군은 모용선비의 수도인 극성을 포위했으나 모용선비의 모용외성을 지키면서 꾀를 내어 우문선비에게만 쇠고기와 술을 보내 위로하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고구려단선비는 우문선비와 모용외가 일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여 철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문선비의 대인 실독관

 

"두 나라(단선비와 고구려)는 비록 돌아갔으나, 내가 혼자 극성을 빼앗을 것이다."

 

라고 말하며 극성을 공격했으나 모용외에게 크게 패하여 달아났습니다.

 


이후 모용외최비에게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요, 달아나는 것은 하책이다"

 

라고 말하자 최비는 위협을 느껴 고구려로 망명하였습니다.

 


331년 2월, 미천왕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고, 미천 언덕에 장례를 지냈습니다.


미천왕은 왕족으로 태어난 후 머슴과 소금장수로 전락했다가 왕이 된 후에는 한사군을 축출했고, 서안평으로 진출하여 요동지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후일 광개토태왕 시기까지 오랜 기간 싸우게 되는 선비족과도 결코 밀리지 않는 기세를 보여주었으니 미천왕의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삼국시대의 두 축인 고구려백제를 건국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소서노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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