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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구려의 역사

고구려의 멸망

by 역사채우기 2021.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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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eyIphWEUjWM

 

이번 시간에는 고구려의 멸망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 제2차 고당전쟁

661년 봄, 당나라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하남ㆍ하북ㆍ회남 지방의 67개 주에서 4만 4천여 명의 병사를 징발하여 평양도행군대총관 유백영과 누방도총관 정명진이 지휘하고 있는 군영으로 가게 하고, 소사업을 부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회흘(위구르) 등 여러 부의 병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같은 해 4월에는, 임아상을 패강도행군총관으로,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소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소사업과 돌궐, 거란 등 여러 군사를 합해 35개 군단이 바다와 육지로 길을 나누어 동시에 진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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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고당전쟁 시기 당군의 지휘관 및 진군 경로를 표시한 지도

 


몇 달 후 8월에는 소정방이 패강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며, 9월에는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수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수비했으나 강에 얼음이 얼자 계필하력이 꽁꽁 언 강을 도하하여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왔고, 고구려군은 크게 패하여 3만 명이 죽었고 연남생은 겨우 살아남아 도망쳤습니다. 


이는 계필하력이 그대로 남하하여 평양을 포위한 소정방과 연합하여 공격할 경우 고구려로서는 큰 위기였으나 때마침 중국 서북 지역에서 철륵(돌궐을 제외한 투르크 계열의 부족 연맹)이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를 공격했고, 반란 진압을 담당한 설인귀가 진압에 실패하여 계필하력이 이끄는 요동도행군은 철수하라는 조서를 받고 돌아가게 됩니다.

 

 

 

| 사수 대첩

662년 봄, 당나라의 옥저도총관 방효태는 소정방과 합류하기 위해 수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상륙한 후 대막리지 연개소문과 사수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포함한 군 전체가 전멸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방효태가 탈출을 권하는 부하에게 "내가 데리고 온 향리의 자제 5천여 명이 이제 모두 죽었는데 어찌 내 한 몸만 살아남기를 바라겠는가?"라며 싸우다 전사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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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 대첩 민족기록화(출처 : 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

 

 

이 전투로 인해 평양을 포위 중이던 소정방은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데다가 보급까지 바닥이 난 상태에서
회심의 공격을 했으나 고구려군의 반격으로 방효태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일본서기>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나라군이 북과 징을 울리며 진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이 용감하고 웅장하여 당나라의 두 보루를 빼앗고 남은 두 보루도 밤에 빼앗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군은 당나라 군사들이 무릎을 껴안고 우는 장면을 보고 날카로움이 둔해지고 힘이 빠져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후회막급이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고구려군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낸 소정방은 신라의 김유신이 고구려군을 뚫고 군량미를 지원해주어 구사일생했고, 보급이 끝나자마자 황급히 퇴각했습니다.

김유신 영정(출처 : http://dh.aks.ac.kr/)

 


이렇게 제2차 고당전쟁도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 연개소문의 죽음과 고구려의 내분

시간이 흘러 666년, 연개소문이 죽고 대막리지를 이어받은 연남생은 여러 성을 순시하러 떠날 때, 그의 두 아우 남건과 남산에게 평양에 남아 뒷일을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남건과 남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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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생은 두 아우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당신들을 죽이려고 하니, 선수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였고 두 아우가 처음에는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한편, 또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두 아우가 형이 돌아오면 자신들의 권세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형에게 대항하여 조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하자 남생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밀리에 자신의 측근을 평양으로 보내어 두 아우를 살피게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두 아우는 남생의 측근을 체포하고 평양에 남아있던 연남생의 아들 헌충을 죽인 후 왕명(보장왕)으로 남생을 소환하였습니다.

 


그러자 보고를 받은 남생은 두 아우가 왕명을 속이고 자신을 궁궐로 불러 죽이려는 것이라고 믿고 감히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에 남건은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출동시켜 남생을 공격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남건에게 패하여 쫓겨난 남생은 옛 도읍인 국내성으로 도주하였고, 그곳에서 아들 헌성당나라에 보내 도움을 요청하는 매국 행위를 저지릅니다.

 


666년 6월, 당 고종이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에게 연남생을 맞이하게 하였고, 연남생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국내성 등 6개 성의 10만 호 백성과 군사 거기다 말갈거란의 무리까지 이끌고 당나라에 항복해 버렸습니다.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는 장면(드라마 연개소문 중에서)

 


그리고 당 고종은 항복해온 연남생을 특진요동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 겸 현도군공으로 책봉하면서 매우 우대했습니다.

 

 

 

| 내우외환(內憂外患) 고구려

당나라는 662년에 제2차 고당전쟁에서 패배한 후 기세가 한풀 꺾였으나 고구려의 내부사정을 꿰뚫고 있던 연남생이 스스로 항복해와 앞잡이가 되었고, 신라의 발목을 잡아주던 백제부흥군은 663년 말 종말을 고하여 신라군이 본격적으로 고구려 전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백제부흥운동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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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0

 

백제의 마지막 희망 복신

https://youtu.be/oPZgK6G9LVQ 이번 시간에는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했던 복신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 백제의 멸망 660년, 신라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5만 군사와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historicalhistory.tistory.com

 


게다가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는 고구려 남부의 12개 성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신라로 도망가기도 했으며, 고구려 서북쪽 지방에서는 당나라를 견제해줄 유목민족(돌궐, 설연타 등)의 반란이 진압된 상황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 신장자치구에 위치한 토번은, 아쉽게도 당나라를 공격하여 안서 4진을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기 불과 3년을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토번의 위치

 

 

상황을 요약하면 고구려는 내부로부터 사분오열되고 있었고, 고구려를 지원해줄 세력은 소수의 말갈족뿐이었습니다.

 

 

 

| 제3차 고당전쟁

당나라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666년 12월,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계필하력
요동도행군부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했으며, 하북 지방 여러 주의 세금까지 동원하였습니다.

이세적(이적)(출처 : commons.wikimedia.org)

 

 

667년 2월, 이적은 그간 공격해왔던 요동성이 아닌 고구려의 신성을 포위 공격하면서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충지이니, 이곳을 먼저 얻지 않으면 다른 성을 쉽게 빼앗을 수 없다.”

 

라고 말하였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신성의 고구려군은 가을까지 악전고투했지만 배신자 사부구가 신성 성주를 결박한 후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면서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그 여파로 주변의 16개 성이 항복하자 금산에서 대막리지 연남건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군에 맞섰으나 크게 패하여 5만여 명의 군사가 죽고 남소, 목저, 창암성이 함락되었습니다.


해가 바뀌어 668년 2월, 설인귀가 선봉이 되어 부여성(천리장성의 북쪽 끝)을 함락시켰고, 부여주 안에 있는 40여 개의 성이 모두 당나라에 항복하였습니다.

설인귀(드라마 대조영 중에서)

 


이에 연남건이 부여성을 탈환하기 위해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섰으나 설하수에서 이적에게 패하여 3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 평양성 전투

668년 6월에는 신라에서 문무왕이 친정하여 20만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 공격에 가세하니 고구려 남부의 2군 12성이 신라에 항복하고 남하 중인 당군과 북상 중인 신라군이 합세하여 평양성을 포위하였습니다.

평양성(출처 : commons.wikimedia.org)

 


나당연합군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평양성을 포위하였고, 보장왕은 대세가 기울었음을 느끼고 연남산에게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이적에게 항복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연남건은 성문을 굳게 닫고 자주 병사를 내보내 싸웠으나 그때마다 패하였습니다.

 


이때 연남건은 승려 신성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는데, 신성은 오사요묘 등과 함께 이적과 내통하는 매국 행위를 하였습니다.


5일 후 승려 신성이 성문을 열자, 이적이 병사를 풀어 성 위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불을 지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 광경을 본 연남건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칼로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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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평양성(드라마 대조영 중에서)

 

 

 

| 고구려의 멸망

이렇게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며 오랜 기간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는 멸망하였습니다.


한 달 후 이적은 보장왕과 연남건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으며, 배신자 연남생은 우위대장군으로, 평양성 성문을 연 승려 신성은 은청광록대부로 삼았고, 마지막까지 저항한 연남건은 검주로 유배 보냈습니다.


그리고 점령한 고구려 지역은 5부, 1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만들었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고구려 유민들을 통치하게 하였습니다.

빨간 원으로 표시된 곳이 안동도호부입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당나라와 신라에 항복하지 않고 항쟁을 지속하는 11개의 성과 고연무, 검모잠, 대조영 등이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고구려 희망의 불씨를 이어나갔습니다.

 

고구려 부흥운동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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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3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일대기

https://youtu.be/pKAqd2Th6LA | 연개소문의 죽음과 고구려의 분열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은 대막리지의 자리를 놓고 내전을 벌이면서 고구려의 상황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결국,

historicalhistory.tistory.com

 

 

 

 

 

다음 시간에는 머슴에서 왕의 지위까지 오른 고구려 미천왕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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