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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구려의 역사

한국 최고의 전투 2편(살수대첩)

by 역사채우기 2021.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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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FNTEjn-mBY

 

 

이번 시간에는 한국사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알려진 살수대첩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 수나라의 통일

581년에 건국된 수나라는 589년에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이로써 수나라한나라가 분열된 뒤 400여 년 이어진 위진남북조 시대를 종식시켰고, 중국을 통일하였습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지도

 


수 문제 양견(수나라 1대 황제)은 돌궐, 토욕혼, 백제, 신라 등의 주변국을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삼았으나 그 세력에 포함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고구려였습니다.

 


이에 수 문제는 고구려에 수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게 하였으며 그렇지 않을 시 군사를 보내 황족 중 1명을 고구려 왕으로 앉히겠다고 협박하는 내용을 담은 친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공격을 받은 건 수나라였고, 고구려가 말갈과 거란의 1만 기병을 동원하여 요서 지방의 임유관(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관문)선제공격하였습니다.

임유관 위치(출처 : commons.wikimedia.org)

 


이 소식을 알게 된 수 문제는 대노하여 598년, 30만 군사를 이끌고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 공격을 지시하였으나 강이식임유관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장마와 태풍으로 군사의 대부분이 죽자 퇴각하였습니다.

 


수 문제는 과거제를 실시하고, 사치를 금하는 동시에 경제를 발전시켜 호구수 증가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에 수 문제의 집권기를 개황의 치(수 문제의 연호를 딴 치세)라고 일컬을 만큼 성군의 면모를 보였으나 고구려 정벌에는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더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뒤를 이은 수 양제 양광(수나라 2대 황제)은 달랐습니다.

수 문제(출처 : commons.wikimedia.org)

 

 

 

| 수 양제의 침입

그는 즉위하자마자 돌궐, 토욕혼, 베트남 등 주변국을 복속해나갔고, 598년에 패전의 치욕(강이식의 임유관 전투)을 안겨주었던 고구려에 칼끝을 겨누었습니다.


612년 2월, 수나라군은 고구려를 향해 출정하였고, 그 규모가 전투병만 113만 3,800명이었고 군량을 수송하는 사람은 그 배였다고 합니다.

 

실제 동원된 숫자는 논란이 있으나 사서에 따르면 무려 300만이 넘는 대군이 출정한 것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대군은 요하(현재의 랴오허 강으로 이 강을 경계로 서쪽을 요서, 동쪽을 요동이라 함)를 건너려 했으나 만든 부교의 길이가 짧았고,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큰 피해를 당하였으나 부교를 다시 건설한 뒤에는 고구려군이 대패하여 1만여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이후 수나라군은 요동성을 수백겹으로 포위한 뒤 맹공을 퍼부었으나 요동성의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대의 규모에 전혀 기죽지 않고 성문을 열고 나와 싸우는 저력을 보여주었고, 수나라는 전쟁 내내 고구려 군대의 저항에 부딪혀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요동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하시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9

 

1차세계대전 이전 가장 많은 군대를 물리친 고구려 요동성

이번 시간에는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의 수백만 군대에 맞서 민족의 방파제 역할의 중심에 있던 고구려 요동성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https://youtu.be/icOgRFWV8l8 | 수나라의 중국 통일과 다가오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이렇게 수나라군은 시간이 지나 음력 6월이 되었는데도 요동성 앞에서 발이 묶이자 초조해진 양제는 좌우익대장군 우문술, 우중문에게 30만 5천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을 공격할 것을 명령합니다.

수 문제는 30만으로 고구려를 제압하려 했으나 수 양제는 별동대만 30만

 


하지만 보급부대 없이 갑옷, 무기, 100일분의 식량을 병사 개개인에게 각각 지급한 것이 문제가 되어 평양으로 가는 도중에 병사들이 식량을 몰래 땅에 파묻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를 알게 된 수나라의 장군들은 병사들이 식량을 버릴 시 참수하겠다고 했지만 이러한 일을 계속 발생되었습니다.

 

그래도 수나라군은 계속 진군해야 했고,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쯤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에 찾아옵니다.


이때 우중문우문술은 고구려의 왕(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올 경우 사로잡으라는 명을 받은 상태였으나 상서우승 유사룡이 사신을 잡아두는 법은 없다고 하며 반대하여 을지문덕은 수나라 진영을 살펴본 뒤 고구려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을지문덕 영정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가 지치고, 식량이 부족한 상태인 것을 파악하였고 그들을 더욱 지치게 하기 위해
백성들을 남쪽으로 피난시킨 뒤 들판을 태우고 우물을 메우는 청야전술을 전개하였습니다.

* 청야전술 :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

 

 

또한, 을지문덕은 남하해오는 수나라 군대에 맞서 싸울 때마다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났으며 일곱 번 싸워 일곱 번을 모두 지는 날도 있었다고 합니다.

 

수나라 군대는 계속되는 승리에 고취되어 있었고, 평양성에 당도하면 내호아의 수군과 합류하여 보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전투의 향방은 보급에 달려있었습니다(드라마 대조영 중에서)

 


하지만 수나라 육군이 그토록 기다리던 수군은 내호아가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독단적으로 평양에 상륙하여
평양성 외성에 입성하였으나 약탈에 정신이 팔려 대오가 흐트러진 사이 영양왕의 동생 고건무(이후 고구려 27대 왕인 영류왕으로 즉위)가 매복해있던 500기의 결사대를 이끌고 수나라 수군을 공격하였습니다.

 

수나라의 역사서인 <수서>에 따르면 "그의 효용이 절륜하여 500명의 결사대로 내호아군을 패퇴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수대첩의 또다른 영웅 고건무(드라마 칼과 꽃 중에서)

 

 

이렇게 수천의 군사만 살아남은 수나라 수군은 돌아가 버렸고, 수나라 육군의 금쪽같은 기회는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 살수대첩

한편, 우중문우문술의 수나라 육군은 평양성 30리 밖까지 당도하였으나 굶주리고 지친 군사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때 수나라 진영에 을지문덕의 편지 한 통이 날아오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대의 귀신같은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하였고
기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를 통달했구나
전쟁에 이겨서 그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떠한가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였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우중문우문술은 분노했으나 더는 작전을 수행할 수 없음을 알고 퇴각을 지시합니다.


612년 음력 7월, 수나라군은 살수를 지나고 있었는데 군대가 강을 반쯤 건넜을 무렵 을지문덕은 공격을
지시하였습니다.

살수로 진격하는 고구려군을 그린 민족기록화

 


그러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수나라군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기에 바빴고 서로 뒤엉켜서 짓밟히고 익사하는 군사가 무수히 많았습니다.


이 틈을 노려 고구려군이 그동안 쌓인 감정을 분출하며 수나라군을 사방에서 공격하니 수나라군은 추격을 피해 하루에 450리나 달아났습니다.

이때 왕인공설세웅의 부대가 최후의 부대가 되어 추격하는 고구려군을 물리쳐 수나라군의 전멸을 막았고, 30만 5천에 달하던 군사는 양제가 있는 요동성에 다다랐을 때 겨우 2천 7백 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때까지도 함락되지 않은 난공불락 요동성

 


이로써 수나라군은 113만 군사를 동원하고도 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한 채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고구려는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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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수업시간에 누구나 한 번쯤 봤을만한 살수대첩 민족기록화

 

 

기록이 부족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당시 고구려 왕이었던 영양왕(고구려 26대 왕)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후 613년부터는 역사서에서 을지문덕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을지문덕을 기리기 위한 마음은 여전히 남아있어 1946년, 중국 화교가 많이 살던 거주지에 중국인의 기를 누르기 위해 '을지로'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제1차 고당전쟁(고구려 당나라 전쟁)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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